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비서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안 군수와 서장을 번갈아보며 말했다.“후보등록 마감 직전에 등록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개가 있습니다.”안 군수와 서장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 눈빛만 교환했다. 비서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상황을 설명했다.“후보 등록자가 더 있다고 해서 급하게 선거관리위원회를 찾아갔는데요. 아 글쎄, 후보 등록을 한 건 맞는데 그게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안 군수는 비서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골프채를 든 안종문 군수 앞에 오인문 사무장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미 테이블의 음식들은 안 군수가 휘두른 골프채에 깨지고 부서져 캠프는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안 군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처박고 있는 사무장의 머리를 골프채로 툭툭 치며 말했다.“인문아. 이제 네가 하다하다 별 짓을 다하는 구나.” “…….”사무장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었다. 안 군수는 들고 있던 골프채를 바닥에 던지고는 조금 누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여야 의원들의 싸움 장면은 고스란히 방송과 신문 1면을 장식했고, 이후 양당의 지루한 신경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외 투쟁과 전원사퇴를 부르짖으며 양 당의 감정싸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갈수록 치졸해지는 싸움은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논의 중이던 수많은 사안은 사라지고, 개나 소가 정치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화두가 됐다. 어처구니없는 이들의 싸움은 일명 ‘개나소나법’ 상정을 두고 치열하게 격돌하는 양상이 되었다. 누가 법안을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나 기자가 병환의 집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병환에게 몇 번을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4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병환이 전화를 받았다. 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침부터 무슨 전화를 이렇게 많이 했어?” “시끄럽고, 집 앞이니까 당장 나와.”병환은 전화를 끊고 30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나 기자는 병환을 보자마자 승용차 조수석에 강제로 태우듯 밀어 넣고 자신도 재빠르게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병환을 다그쳤다.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나 기자, 술 한 잔 사주라.”병환은 맥주 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두 잔째 소주를 붓고 있는데 나 기자가 포장마차로 들어섰다. 벌컥벌컥 소주를 마시는 병환의 모습을 보고 나 기자는 놀란 얼굴을 하며 앞자리에 앉았다.“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마셔라. 그러다 골로 간다.”빈속에 소주 두 컵을 연거푸 들이킨 병환은 서러운 표정으로 조금 전 안 군수와 있었던 일을 풀어 놓았다. 병환의 이야기를 듣던 나 기자는 축 늘어진 병환을 보며 말했다.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병환은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의 법학과에 턱걸이로 진학했다. 하지만 턱걸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소원대로 서울에 있는 대학의 법대생이 됐다는 것만으로 병환은 집안의 큰 자랑이었다. 병환의 아버지는 마을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고, 어머니는 집 마당에 잔칫상을 차렸다. 몇 몇 까칠했던 동네 사람들도 이날만큼은 병환의 법대 진학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날은 밤새 술판이 벌어졌지만, 누구 한 사람 시끄럽다고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일찍 샴페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선거관리위원회가 내려다보이는 낡은 다세대주택 옥상 위에 박병환과 나기영 기자가 나란히 벽을 등지고 앉았다. 두 사람은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까만 강아지 한 마리가 시멘트 바닥에 배를 깔고 열심히 개 껌을 뜯고 있었다.한동안 구름의 흐름을 쫓던 나 기자는 몸을 틀어 병환을 바라봤다. 나 기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병환아! 지금 몇 시간째냐? 마감이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어.”병환은 나 기자의 말에 아무 대꾸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사무장은 안 군수가 제법 거칠게 볼을 잡아당기는데도 마냥 신난 얼굴로 히죽거렸다. 안 군수는 함께 올라온 서장을 기획실로 안내한 뒤 사무장을 따라 캠프로 들어섰다. 캠프 문이 열리자 안 군수의 얼굴을 본 회원들은 ‘안종문!’을 연호하며 반겼다.안 군수는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잠시 정신 줄을 놓고 혼란스러워하던 안 군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캠프 안으로 천근같은 발걸음을 뗐다.당황하고 있는 안 군수와 달리 사무장은 주먹을 불끈 쥐고 위 아래로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호텔 뷔페가 부럽지 않은 파티 준비가 끝나자 사무장은 주차장이 보이는 캠프 뒤편 창문을 열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캠프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군사모(군수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다. 회원들은 당선인을 대하듯 사무장에게 악수를 청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사무장도 당연한 인사를 받듯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군사모 회원들이 들어오고 뷔페 직원들이 퇴장하자 파티 진행을 맡은 스태프 한 무리가 캠프에 들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클로징 멘트를 남겨 둔 앵커에게 급하게 쪽지 한 장이 전달됐다. 쪽지를 다 읽은 앵커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1분이 넘도록 말이 없었다. 방송 사고였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앵커를 계속 비추고 있었다. 무거운 시간이 흐르고 바싹 마른 앵커의 입이 열렸다.“참담한 날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죠. 이정표를 잃은 우리는 이제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영호의 죽음은 결국 자살로 종결됐다. 나는 영호의 죽음 앞에 서글프게 울던 종현이 마음에 걸려 한동안 종현이에게 전화를 자주 걸었다. 가끔 만나 술도 마셨고, 종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되는 나의 관심이 부담이 됐는지 종현이는 그때는 그냥 감정이 복받쳤던 것 뿐이라며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종현이의 모습은 왠지 불안해 보였다.* 오랜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온전한 휴일을 보냈다. 마 부장에게 전화가 걸려 온 건 오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종현이를 만났을 때는 이미 해가 빌딩 뒤로 사라진 후였지만 어둠이 짙게 깔리지는 않았다. 종현이와 나는 포차에 마주 앉았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종현이었다. “최근에 영호하고 통화했어?” “그러고 보니 좀 됐네. 벤츠 샀다고 자랑할 때 통화했으니까. 넌?” “며칠 전부터 전화를 안 받더라고.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멘트만 나오고.” “그래….” 그리고 또 침묵이 이어졌다. 종현이와 나는 별말 없이 한동안 술을 마시는데 집중했다.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영호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불현듯 기억 속에서 이미 지워졌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나는 어린 시절 주위 사람들로부터 의젓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저 마음껏 웃는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말이 없었을 뿐인데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어른스러워 보였던 모양이다. 내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나와 누나 사이에는 나 보다 두 살 많은 형이 있었다. 형이 지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우리 집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화목하고 행복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마 부장은 그날 이후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듯 어쩐지 다른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화가 줄어들었다. 내 질문에 대답 대신 미소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마 부장의 책상에 있던 가족사진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책상의 한 부분이나 마찬가지였던 마 부장의 가족사진은 아마도 책상 속으로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마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마 부장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대리로 승진한 뒤 얼마 되지 않은 겨울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겨울비가 장맛비처럼 쏟아졌다. 월세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고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간 뒤부터 나는 매일 긴장 속에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잠을 자는 날은 어김없이 전쟁을 치러야했다. 그날도 늦잠을 잔 덕에 우산도 챙기지 못한 채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날씨가 춥고 비도 많이 오지 않아 곧 그치려니 했다. 아니면 눈으로 바뀌겠지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마 부장은 말을 꺼냈다. 마 부장은 기념 책자 작업이 시작된 후 몇 개월 동안 까다로운 사장의 비위를 맞춰가며 밤낮 없이 일했다. 마 부장은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장과 약속한 별도의 성과금 때문이라고 했다. 마 부장은 기념 책자를 납품하고 약속대로 1000만원의 성과금을 받았지만 이제 쓸데가 없어졌다고 했다. 잠시 말을 끊었던 마 부장은 술잔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 있으면 와이프와 애가 한국에 들어오거든.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마 부장은 평소와 다르게 술을 급하게 마셨다. 일부러 취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주사까지 부리는 마 부장의 모습은 평상시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윤 대리, 아니 윤과장. 자네가 자주 간다는 술집 있지? 오늘 2차는 거기로 가자구.” “부장님. 많이 취하셨어요.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시고, 다음에 제가 한 번 모실게요.” “왜? 나 같은 놈은 국밥 한 그릇 시켜놓고 깍두기 국물에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자신의 일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는 회사 분위기 속에서 마 부장의 유일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유튜브 때문이었다. 입사 초기부터 마 부장은 내가 수주한 광고를 주로 담당했던 선배였지만 대화는 없었다. ‘진광씨! 어때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가 둘 사이 대화의 전부였다. 그것도 대부분은 마 부장의 얼굴이 아닌 마 부장 책상의 모니터를 보고 말하는 수준이었다. 마 부장은 나 뿐 아니라 다른 회사 직원들과도 별로 대화를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나는 결국 지방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으로 지겨운 고시원 생활을 마무리했다. 4년이라는 시간과 맞바꾼 결과로는 너무나 초라했지만 집에서도 더 이상 나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누나가 있을 때는 간간히 집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누나가 결혼한 뒤로 집은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였다. 집 안을 휘감고 있는 숨 막히는 고요함은 가끔 고시원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오고 나니 이미 서른 즈음에
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시간의 흐름은 거침이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만 흘러갔다.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고, 괴롭고, 고단한 역경도 모두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 투정에 불과했다. 공부만 빼고 쓸데없는 많은 것들을 잘했던 영호는 어엿한 게임회사 사장이 됐고, 일찍 취업 전선에 뛰어든 종현은 임원을 바라보는 안정된 중간 관리자로 정착했다. 하지만,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