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나는 결국 지방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으로 지겨운 고시원 생활을 마무리했다. 4년이라는 시간과 맞바꾼 결과로는 너무나 초라했지만 집에서도 더 이상 나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누나가 있을 때는 간간히 집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누나가 결혼한 뒤로 집은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였다. 집 안을 휘감고 있는 숨 막히는 고요함은 가끔 고시원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작가 하찬은(필명)
작가 하찬은(필명)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오고 나니 이미 서른 즈음에 와 있었다. 
 고만고만한 대학교를 졸업한 결과로 나는 고만고만한 직장에 들어갔고,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광고회사 영업직 일을 시작했다. 직장을 고를 처지는 아니었다. 빨리 직장을 구하고 집을 나오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히 첫 직장에 나름 잘 적응했다. 어쩌면 잘 적응했다기보다 딱히 부딪힐 사람이 없다보니 그저 흐르는 시간에 잘 올라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직장 동료들은 업무적인 대화 이외에는 다른 직원들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들의 무관심이 감사했다. 더욱이 외근 업무를 하다 보니 내근 직원들과 마주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광고를 수주해오고 디자인 초안이 나오면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디자인부 직원들은 대부분 연차가 오래돼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광고 시안을 적당히 잘 만들어냈다. 
 밖에서 혼자 밥을 먹게 되는 시간이 늘면서 나는 문뜩문뜩 영업사원이 된 내 모습을 돌아보곤 했다. -대체로 수주를 기대하고 찾아간 곳에서 성과가 없을 때 습관처럼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고작 이 일을 하기 위해 고시원 생활을 했던 것일까 되물었다. 차라리 일찌감치 취업을 선택할 걸, 차라리 해보고 싶은 것이라도 원없이 해볼걸, 나는 왜 미련하게 고시원에서 그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까. 그럴 때 마다 나는 원망의 대상을 찾았고, 언제나 그 원망의 대상은 엄마였다. 
 “그래도 첫 번째 수능이 성적이 가장 좋았어요. 그때 그 성적이면 적어도 원하는 학과는 갈 수 있었다고요?”
 “원하는 학과? 그래 네가 원하는 학과가 무슨 과였는데?”
 “…….” 
 직장을 구했다는 통보와 함께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한 날, 엄마는 혼잣말처럼 ‘고작 그런 회사에 들어가려고……, 쯧쯧쯧.’하며 혀를 찼다.
 나는 몇 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 엄마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원하는 학과가 어디였냐는 물음에 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날 이후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가슴 속으로만 엄마에 대한 원망을 키워갔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원망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그저 묵묵히 내 일을 했지만, 별다른 계획이나 목적은 없었다. 그냥 살아지니 살아지나보다 하며 시간에 자조를 얹어 흘려보냈다.

*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들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이유로 과장으로 승진을 했다. 그다지 빠른 승진도 아니었고, 승진을 했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뻐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한마디씩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자 ‘그래 뭐 나쁠 것도 없지’하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영호의 문자를 받기 전까지.
 “진광아! 어때? 이번에 하나 장만했다.”
 문자와 함께 보내 온 사진에는 검정색 ‘벤츠’에 비스듬하게 기대고 손가락 하트를 날리고 있는 영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개새끼, 타이밍 죽이네.”
 
*

 “윤 대리, 아니 이제 윤 과장이라고 불러야지. 오늘 같은 날 한 잔 사야되는거 아냐?”
 마 부장이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입사 초기부터 내 광고를 전담했던 선배라 그래도 직장 내에서는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동료이자 대화 상대였다.
 “갑자기 술맛이 뚝 떨어지네요.”
 “왜? 직장인이 승진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다고.”
 “그러게요. 아주 잠시잠깐 승진한 기분에 취해볼까 했는데, 망할 놈의 친구 녀석이 초를 치네요.”
 “무슨 일 있어?”
 나는 대답 대신 마 부장에게 영호가 보낸 문자 속 사진을 보여줬다.
 “이야, 이거 벤츠 아냐?”
 “네, 벤츠랍니다. 이 새끼가 어렸을 때 성공의 기준이 벤츠라고 했던 놈인데 하필 20년 일하고 겨우 과장 승진하는 날 이런 사진을 보내네요.”
 “아, 그 게임회사 사장이라는?”
 “네, 이제 곧 살거다 한지는 한 2~3년 됐는데, 진짜 샀네요.”
 마 부장은 사진을 확대해가며 유심히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윤 과장, 이 사진 지워버려. 이거 보고 있으면 속만 아프지. 승진 술 한 잔 얻어먹으려고 했더니, 내가 위로주를 사야겠구만. 일단 나가자구.”
 나는 못 이기는 척 마 부장을 따라 나섰다.

저작권자 © 뉴스앤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