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작가 하찬은(필명)
작가 하찬은(필명)

깊은 한숨과 함께 마 부장은 말을 꺼냈다.
 마 부장은 기념 책자 작업이 시작된 후 몇 개월 동안 까다로운 사장의 비위를 맞춰가며 밤낮 없이 일했다. 마 부장은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장과 약속한 별도의 성과금 때문이라고 했다. 마 부장은 기념 책자를 납품하고 약속대로 1000만원의 성과금을 받았지만 이제 쓸데가 없어졌다고 했다.
 잠시 말을 끊었던 마 부장은 술잔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 있으면 와이프와 애가 한국에 들어오거든. 그래서 힘들고 지쳐도 당장 눈앞에 있는 돈이 욕심이 났지. 애가 오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싶었고, 또 다시 미국에 들어 갈 때는 용돈도 넉넉하게 주고 싶었고…….”  
 마 부장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유진이 안주를 권했지만 마 부장은 사양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와이프가 한국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네.”
 나는 마 부장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지금 상황이 좀 그렇잖아요. 감염병도 문제고, 당장은 못 와도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 그때 보시면 되죠. 많이 보고 싶으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위로의 말이라고 건넸지만 마 부장에게는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아 보였다. 마 부장은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신 후 말했다.
 “그렇지.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며칠, 아니 몇 달인들 못 기다리겠어.”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어하세요. 조금만 참으시면 되는데…….”
 마 부장은 또다시 술잔을 들었다. 마 부장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 부장은 한숨을 내쉬고 멍한 시선을 들어 유진의 뒤에 있는 벽을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벽에는 대략 10호 사이즈 정도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텅 빈 터널 사진이었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듯 터널 주변에는 공사 장비와 자재들이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두 개의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이 모두 나가고, 카페에는 나와 마 부장, 그리고 유진만 남았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마 부장은 술잔을 들고 있을 뿐 술은 마시지 않았다. 마 부장의 시선은 여전히 사진 속 텅 빈 터널에 있었다. 얼마간의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마 부장이 나와 유진이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미안해 김 대리, 오늘 처음 뵙는데 죄송합니다. 분위기를 망쳤네요.”
 마 부장은 술이 취했지만 정중하고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유진은 정색을 하고 손을 내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많이 속상하시겠어요.”
 마 부장은 말없이 미소를 건넸다. 미소 너머에 슬픔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유진은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마 부장이 보고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이 사진, 오빠가 찍은 거예요. 건설회사에 다녔었는데 처음으로 책임을 맡아 공사한 터널이래요.”
 유진의 말에 마 부장의 시선이 조금더 사진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술은 취했지만 사진을 바라보는 마 부장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소믈리에가 와인의 깊은 맛을 끌어내 듯 천천히 음미하며 꽤 오랫동안 공들여 사진을 들여다봤다. 나도 마 부장의 시선을 따라 사진을 바라봤다. 마 부장은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터널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유진에게 물었다.
 “저게 어디죠?”
 유진은 마 부장의 말에 사진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공항으로 이어지는 서울 외곽의 어디라고 했는데, 잘은 모르겠네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나는 사진을 천천히 쳐다보다 유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준공 기념사진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공사 중인 터널을 찍은 사진이네요.”
 유진은 흘깃 사진을 한 번 보고 말했다.
 “그러게요. 저 사진을 찍어서 자랑할 때만해도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공사가 끝나고 나서는 그저 그랬던 것 같아요.”
 나는 유진의 말에 술을 한 잔 마시고 물었다.
 “지금은 뭐하시는데?”
 유진은 감을 하나 가져와 깎으면서 말했다.
 “몰라요. 공사 끝나고 외국에 가서 살겠다고 떠났어요. 가끔 엽서를 보내오는데, 얼마 전에는 필리핀에서 왔더라고요. 지금은 또 어디로 갔는지 모르죠. 엽서가 오면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 정도예요. 워낙 멋대로 사는 사람이라.”
 유진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유진의 말에 마 부장은 호기심이라도 생긴 것처럼 관심을 보였다. 
 “갑자기 말이죠?”
 유진은 감을 깎던 손을 멈추고 무언가 떠올리려는 듯 잠시 위를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음, 생각해보니 갑자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공사 중에 인부가 두 명이나 죽었다고 했었어요. 오빠는 사망자들에 대한 보상 먼저 제대로 하고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는데 회사에서는 소문나서 좋을 것 없다고 대충 처리해서 덮었다나봐요.”
 마 부장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유진의 말에 터널 사진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그 사진 떼어서 봐도 돼요?
 유진은 괜찮다며 사진을 떼어 보여줬다. 유심히 사진을 들여다보는 나에게 유진이 물었다. 
 “왜? 뭐가 있어요?”
 “아니, 여기 조그맣고 하얀 게 있어서 뭔가 했더니, 토끼네요. 두 마리.”
 유진과 마 부장은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함께 들여다봤다. 유진은 신기한 듯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진짜 토끼네. 그동안 왜 전혀 몰랐지?”
 사진 속 터널 입구에는 토끼 두 마리가 있었다. 한 마리는 아주 작았다. 내가 엄마 토끼와 아기 토끼 인 것 같다고 했더니 마 부장은 잠시 토끼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럼, 아빠 토끼만 없네.” 
 마 부장과 나는 잠시 후 카페에서 나왔다. 나는 휘청거리는 마 부장을 택시에 태워 보내려 했지만 마 부장은 한사코 혼자 걷고 싶다고 했다. 내가 따라가는 것도 마다했다. 마 부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 위로 손을 휘휘 저으며 걸어갔다.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마 부장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마 부장의 어깨가 물 먹은 스폰지처럼 축 쳐져 있었다. 점점 작아지는 마 부장의 모습을 보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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