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시간의 흐름은 거침이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만 흘러갔다.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고, 괴롭고, 고단한 역경도 모두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 투정에 불과했다. 
 공부만 빼고 쓸데없는 많은 것들을 잘했던 영호는 어엿한 게임회사 사장이 됐고, 일찍 취업 전선에 뛰어든 종현은 임원을 바라보는 안정된 중간 관리자로 정착했다. 
 하지만,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도 나에게만은 예외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내가 가혹한 시간에 갇혀 버린 것인지, 시간이 가혹한 내 현실 앞에서 멈춰버린 것인지 내 답답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작가 하찬은(필명)
작가 하찬은(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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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영호를 다시 만난 것은 내가 고시원 생활 3년차에 접어들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먼저 나를 알아본 영호는 반갑다며 힘껏 끌어안았다. 다소 놀란 표정의 내 모습을 보며 영호는 다짜고짜 나를 이끌고 술집으로 향했다. 영호의 반가운 표현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나 역시 놀라긴 했지만 반가운 마음은 영호와 다르지 않았다. 
 뭘 하고 지내냐고 묻자 영호는 그동안 사업을 구상했고, 곧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사업 구상’이라는 말이 ‘놀고 있다’는 말로 들렸고, 그래서 너무 해맑은 영호의 표정이 적절한 표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영호의 해맑은 표정에 심통이 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2년이 넘도록 고시원에서 벽과 천장을 보며 한숨만 키워왔으니까.   
 “야! 놀고 있다는 놈 표정이 너무 밝은 거 아냐?” 
 영호는 내 잔에 술을 따르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허, 노는 게 아니라 사업을 구상했다고, 이제 곧 시작한다니까.”
 그래 들어나 보자. 나는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무슨 사업인데?”
 “기억 나냐? 내가 고등학교 때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해 준거? 뭐 물론, 세기말 종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종말론이 뭔가 사람의 관심을 끌기에는 그럴 듯 하잖아. 그래서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야.”
 도대체 이놈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 것일까? 
 세기가 바뀌면서 종말론은 자취를 감췄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종말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는 것만으로 시간은 늘 부족했다. 오직 영호만이 그 쓸데없는 생각의 끈을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영호의 그 쓸데없는 생각들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재수도 성공 못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너처럼 쓸데없는 생각으로 허송세월을 보내지는 않았다. 나는 그래도 책을 보면서 공부를 했으니까.’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술맛이 달았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영호에게 물었다.
 “여전히 쓸데없는데 시간 낭비를 하고 있구나. 야 임마! 우리도 이제 스물이 넘었어. 정신 차려야지.”
 나의 비웃음이 느껴졌을 법도 한데 환하게 웃는 영호의 표정은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진광아! 나 다음 달에 벤처 파크에 입주한다. 아직 뭐 투자자까지 생각할 단계는 아니지만, 이거 대박 나서 성공하면 내 얼굴보기 힘들어진다. 생각 있으면 너도 쓸데없이 서울에 있는 대학 간다고 하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와. 혹시 알아 내가 나중에 부사장 시켜줄지.”
 껄껄거리며 말하는 영호의 얼굴이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쓸데없다’는 말은 항상 내가 영호에게 했던 말인데, 내가 그동안 해 온 공부가 한순간에 정말 쓸데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무슨 기분인지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자신감에 찬 영호의 얼굴을 보며 문뜩 ‘성공’이라는 뻔한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영호야! 근데 어떤 게 성공한 건데? 너한테 성공의 기준이 뭐야?”
 영호는 내 말에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멈췄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대답했다.
 “음, 그래. 성공의 기준이 있어야 겠구나. 역시 배운 놈이라 똑똑한데. 나는 그럼 성공의 기준을 벤츠로 정해야겠다. 성공했다면 적어도 벤츠는 끌고 다녀야지.”
 “야야!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그냥 술이나 마셔.”
 오랜만에 만난 영호와 나는 그날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그날 이후 영호와 나는 자주 전화 통화도 하고 만나서 술도 한잔씩 했지만 영호가 벤처 파크에 입주한 뒤로는 가끔 전화 통화만 할 뿐 좀처럼 만나기는 어려웠다. 
 영호를 만난 이후 종현이와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 영호와 종현이는 내가 고시원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종종 만났다고 했다.
 우연히 영호를 만난 후 열흘쯤 지나서 종현이와 술자리가 잡혔다. 고등학생 때나 별반 다르지 않았던 영호와는 달리 종현이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더 의젓해진 모습이었다. 아직 대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닌, 그렇다고 딱히 무슨 일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 나에게 종현이가 내민 명함은 그저 낯설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영호만큼이나 반가웠지만 또 그만큼의 거리감도 느껴졌다. 종현이는 명함을 꺼낸 지갑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쑥스러운 듯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야! 이제 명함 주는 게 익숙할 만도 한데, 아직도 왜 이렇게 어색하냐. 넌 친구니까 그냥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이 주는 거지. 모르는 사람들 만나면 아직도 명함 꺼내기 전에 몇 번이나 지갑을 만지작거린다니까.”
 -사원 이종현
 늘 부르던 친구의 이름을 문자로 확인하는 기분은 묘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대신 말해주는 명함은 또래 친구를 한참 어른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나는 애써 낯설게 느껴지는 종현이의 모습을 떨쳐내기 위해 명함을 앞뒤로 돌려보며 말했다.
 “멋지다. 이제 진짜 회사원 티가 나는데.”
 영호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치? 나도 처음에는 이놈이 회사를 다니긴 다니는건가 했는데, 막상 명함을 받으니까 새롭게 보이더라. 출세했지 뭐, 종현이 덕분에 동생들도 기가 살았단다. 지 형이 용돈도 주고 하니까.”
 나는 영호의 말에 괜히 종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야, 이제 형 노릇 좀 하는 거야? 직장인이니까 오늘 술도 네가 사는거고?”
 종현은 웃는 얼굴로 내 목을 조르며 말했다.
 “당연하지 임마! 내가 이 백수들한테 얻어먹겠냐?”
 잠시 낯설게 보였던 종현이의 모습은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술이 얼큰해 지자 내 입에서는 한탄 섞인 푸념이 흘러 나왔다.
 “나도 종현이 너처럼 그냥 일찍 취업이나 할 걸 그랬나 싶다.”
 종현이는 나의 한숨 섞인 푸념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공부가 잘 안돼? 뭐 취업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임마! 너는 서울권 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되는데 아깝지.”
 “재수까지 물 먹으니까 이제 힘이 빠지는 것 같다.”
 “그럼 진짜 취업해. 내가 해보니까 정말 나쁘지 않아.”
 종현이의 말에 영호가 술을 한 잔 비우고는 끼어들었다.
 “야야! 진광이 부모님이 가만 계시겠냐? 서울대 목표로 공부하던 놈이 서울권 대학도 아니고 지방대도 아니고, 고졸 취업을 한다고 하면 좋아라 하시겠다.”
 영호 말이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마도 부모님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첫 수능시험을 망쳤을 때는 그나마 누나가 위로하도 해줬지만 재수까지 망쳤을 때는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지방대라도 갈까 했지만 어머니는 용납하지 않았다. 영호의 말에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 대신 종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니들 ‘일취월장’이라고 들어봤어?”
 영호와 나는 동시에 종현을 바라봤다. 영호가 ‘고사성어’ 아니냐고 물었고, 종현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 아가들아! 일취월장은 말이지 ‘일찍 취업해서 월급 받는 장한 청년’이라는 말이다. 알겠냐?”
 “허, 그럴 듯 한데.”
 종현은 내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먼저 취업을 해서 일을 해보니까 말이지 정말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거든. 뭐 공부가 먼저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 먼저 하다가 공부하면 어때? 불법도 아니고 말이지. 난 내후년쯤에는 대학도 갈 거야.”
 영호가 종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종현이가 회사를 다니더니, 많이 성장했네. 계획을 다 세우고. 기특한데.”
 종현이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적응하는데 힘들더니, 적응이 되고 나니까 회사가 돌아가는 게 보이더라고. 우리 부장님도 고졸로 입사해서 지금은 석사야. 우리 회사는 대학에 들어가면 지원금이 나오거든. 그리도 또 대학가면 나중에 승진할 때도 도움이 되고. 그래서 난 대학가고, 나중에는 임원까지 올라갈란다.”
 종현의 어깨를 토닥이던 영호가 갑자기 종현의 머리를 치며 말했다.
 “이놈이 이거,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거침이 없구나.”
 종현이와 영호가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웃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직 사회 첫 발은커녕 고등학교 5학년에 머물러 있는 나와는 달리 종현의 꿈은 이미 목적지를 정하고 먼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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