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오늘의 불쾌지수'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작가 하찬은(필명)
작가 하찬은(필명)

클로징 멘트를 남겨 둔 앵커에게 급하게 쪽지 한 장이 전달됐다. 쪽지를 다 읽은 앵커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1분이 넘도록 말이 없었다. 방송 사고였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앵커를 계속 비추고 있었다. 무거운 시간이 흐르고 바싹 마른 앵커의 입이 열렸다.

“참담한 날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죠. 이정표를 잃은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요? 오늘의 앵커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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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 등록 마감이 한 시간 남았다는 자막이 나오자 선거캠프의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TV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한 남자가 무전기에 대고 짧은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이어폰을 낀 사람들이 옷깃에 대고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들은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은 요원들처럼 서로에게 수신호를 보내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직사각형으로 생긴 대형 테이블이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었고, 그 위에 하얀 테이블보가 깔렸다. 오랜 시간 숙련된 듯 그들의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어 입꼬리를 한껏 올린 미소로 남녀 직원들이 갖가지 요리를 정해진 위치로 옮겼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요리와 찬 음식, 한식과 후식이 끊임없이 테이블에 놓여졌다. 컴베이어 밸트가 작동하듯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들의 움직임에 테이블은 금세 빈틈없이 채워졌다.

원형 테이블에는 포크와 나이프, 젓가락과 숟가락이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원형 테이블 맨 앞줄의 특별석

중앙에는 ‘시바스리갈’이 위용을 과시했다. 뷔페 직원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오인문 사무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좋아! 조금만 더 서두릅시다.”

한껏 들떠있는 사무장과는 달리 안종문 군수의 비서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사무장님. 이게 뭐하시는 겁니까? 선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잔치라뇨.”

사무장은 비서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비서님은 매사 걱정이 너무 많아. 종문이 형님이, 아니 우리 군수님 당선이 확정됐는데 뭐가 걱정이야.”

 “사무장님, 당선이라뇨? 후보 등록이 끝났다고 선거가 끝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비서의 잔소리가 계속되자 사무장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단독 후보라고, 단독 후보! 싸움은 끝났어.”

비서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사무장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더 선거법을 조심해야죠. 군수님 삼선이야 의심하지 않지만, 그래도 선거가 끝날 때 까지는…….”

비서가 선거법을 들먹이자 사무장은 비서의 말을 가로막으며 언성을 높였다.

“법대 나왔다고 날 가르치겠다는 거야? 어디다 선거법을 들먹여?”

사무장은 비서의 어깨를 밀쳐내며 뷔페 직원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빨리 빨리 마무리합시다.”

비서는 한숨을 내뱉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캠프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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