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색감과 따스한 촉감으로 충만한 기억을 되새기다 보면 결국에는 단단해 보였던 우리의 관계가 열없이 허물어져간 장면들에 당도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테면 그것은 구드룬 엔슬린과 안드레아스 바더가 연인 사이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 여름밤처럼 평범한 대화 끝에 찾아왔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배경으로 한 소설집의 표제작이자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다른 세계에서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작가는 가장 동시대적인 윤리와 사회문제를 소설로 풀어내며 정교하고 치밀한 질문을 던지는 리얼리스트다. 다양한 인물들의 다채롭고 이질적인 목소리와 시선을 교차하며 서사를 구축하면서 골똘히 고민해봐야 하는 현실 사안의 세부와 인간 본연의 모순적인 지점까지도 감각하게 한다. 이현석의 소설은 현재의 세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치열하게 기억하고 기록하며, 그럼으로써 망각을 저지하며 더 나은 이후의 세계를 맞이하려는 삶의 문학이다.

이현석의 소설은 다분히 이지적인 방식으로 활달하고 생명력 있는 이 세계의 순간들을 그려내며 우리를 매혹 속으로 이끈다. 또한 다채로운 소재와 방식과 구성으로 풍성하고도 능란하게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라이파이」는 1959년부터 10년간 연재된 동명의 SF만화를 소설 속으로 끌어온다. ‘라이파이’는 한국 최초의 토종 히어로. 검은 안대를 쓰고 흰 두건을 이마에 두른 라이파이는 연두색 쫄쫄이 유니폼을 입은 채 돌려차기 한 방으로 적들을 제압한다.

 ‘나’(영우)의 아버지 조한흠이 청소년기에 열광했는데, 이제는 노년에 다다른 조한흠의 환시 속에 라이파이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한흠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 가히 뛰어난 도시 연애담이라고 할 법한 「컨프론테이션」은 이제는 사랑에 다소 심상한 전문직 여성 화자에 대한 탄성 넘치는 심리 묘사가 압권이다. 소설은 ‘내’가 다시 연애 감정을 느끼며 예외적인 관계로 한 사람을 들이는 그 순간을, 단단해지다가도 이윽고 허물어져가는 그 관계성을 성찰해내는데,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회화 '컨프론테이션'의 배경과 묘하게 교차시키며 삶의 비의를 곱씹게 한다.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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