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하찬은(필명)씨의 소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작가 하찬은(필명)
작가 하찬은(필명)

아무도 가보지 않은 20세기의 끝은 막연한 불안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불안감은 돈으로 환산됐고, 거대 기업들은 불안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막대한 자본을 쏟아 부었다. 상업영화 시장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99년 극장가는 인류 멸망을 다룬 영화들이 앞 다퉈 개봉됐다. 영화 포스터에 ‘종말’이라는 문구만 있어도 흥행이 보장될 정도였다. 영화는 소행성 충돌로, 핵전쟁으로, 화산 폭발로, 방사능 오염으로 인류를 파괴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동원했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인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영화는 흥행했다. 관객들의 불안감은 곧 흥행의 척도였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1999년 이후의 모습은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웠다.

 하지만 종말론은 나에게는 와 닿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반드시 죽어야할 사람이 나 혼자라면 억울하고 분하겠지만 모두 다 같이 사라져버리는 세상은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지금 이 순간 종말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망쳤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뿐이다. 나에게는 여기가 지옥이고, 종말은 간절한 바람이었다. 

 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10대의 마지막 일탈을 위한 술자리가 마련됐다. 시험 백일 전부터 계획된 자리였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종말론은 술자리까지 따라왔다. 나는 술의 힘을 빌려 이성을 버리고 싶었지만 도무지 술 마실 분위기가 아니었다. 종말이라는 것이 1999년에 오든, 2000년에 오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종말이 지금 우리 현실보다 더 비참할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애당초 대학 진학에는 관심이 없었던 영호가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꺼냈다. 공부 말고는 뭐든지 잘하는 녀석이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알지? 미국은 이미 그 옥상에 외계인과 송수신이 가능한 첨단장비를 비밀리에 설치했다는 거야. 왜겠어?”
 시답잖은 이야기에 친구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종현이 술집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영호가 막 외계인 침공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3학년 때 취업반을 선택한 종현은 대학은 포기했지만 이미 취업이 결정된 상태였다. 종현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밖이 추운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야! 니들 얘기 들었어? 2반 호석이가 수능 끝나고 자살했대.”

 친구들은 일시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종현을 올렸다봤다. 호석은 전국 상위 1프로에 속해 있는 수재 중에 수재였다. 선생님들은 대한민국 그 어떤 대학도 호석이가 마음만 먹으면 못갈 대학이 없다며 늘 다른 학생들의 기를 죽였다. 그래서 호석이는 학교의 자랑이었다. 나와는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 꽤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그런 호석이가 죽었다니, 다들 종현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외계인 이야기를 풀어내던 영호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냈다.

 “뿔테안경 끼고 키 작은 애? 걔는 전국에서도 탑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애가 왜?” 

 친구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외계인이니, 종말이니 하는 이야기는 이제 자취를 감췄다. 나는 더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을 나왔지만 누구도 어딜 가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뜬금없이 호석이가 왜 자살을 했는지 보다 친구들의 마음이 더 궁금해졌다. 친구들은 호석이가 죽은 것이 충격일까, 공부 잘하는 호석이가 죽은 것이 충격일까.  

 아직 겨울이라고 하기에 어색했지만 거리는 제법 쌀쌀했다. 목덜미로 날카로운 바람 한줄기가 지나가자 몸서리가 쳐졌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목도리를 챙겨주던 엄마의 손을 뿌리친 것이 후회됐다. 갈 곳 없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험생들의 행렬을 더듬더듬 피하며 한참을 걷다 멈춰선 곳은 가전제품 판매점이었다. 넓은 창 안에 있는 TV에서 조금 전 종현이가 이야기했던 호석이의 사망 소식이 뉴스를 통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뉴스를 보았다. 우리 학교 모습이 모자이크 처리돼 화면에 잠시 나왔다 사라졌다. 
*
 그렇게 시끄럽던 종말은 결국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1세기는 그저 20세기가 끝나고 찾아온 계절 같은 것이었다. 더 이상 누구도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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