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영의 하루한줄] 분열과 불안 속에 사는 여성들, 그들의 삶을 전면화하다
[강선영의 하루한줄] 분열과 불안 속에 사는 여성들, 그들의 삶을 전면화하다

 

"아이에게 설탕을 먹이지 않겠다는 다짐이 돌 전에 무너졌던 것처럼, 분홍색과 파란색을 똑같이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이 처음부터 아예 실현되지 않았던 것처럼, 왜냐하면 여자아이들의 물건은 대부분 분홍색이었고 분홍색 물건들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예뻤기에, 아이가 매번 분홍색 물건을 집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종숙 언니는 무엇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최근 N번방 사건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경유하며 ‘불안’은 여성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주요한 감각으로 자리 잡았다. 불안은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다양한 혐오와 사회적 압박에서 비롯된 것인 동시에, 스스로가 부여하는 제한과 경멸, 혐오 등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불안은 개인적 차원의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의 경험이 겹겹이 중첩되는 곳에 놓이는 공통의 것이다. 그러나 공통의 경험이 곧바로 연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삶속에 가로 놓여있는 다양한 차이는 우리를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위치에 놓아두며, 불균질하고 비이성적인 충동 속에 위치시킨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 등, 특정 공간이나 특정 관계에서의 불안을 매개로 인간의 심리를 세밀히 파헤치는 고딕-스릴러 장르는 이런 비뚤어지고 거친 마음의 결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불안을 전면화한다. 뿐만 아니라 그 불안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여러 이슈들과 함께 공명하며 오래도록 여성의 것으로 여겨진 ‘히스테리아’를 해체하고 재조직한다. 

‘고딕-스릴러’라는 장르를 통과하여 우리는 ‘기묘하고 표정이 읽히지 않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미쳐 있는’ 등의 이유로 사라져왔던 여성의 서사를 지금 이곳에 가장 문학적인 방식으로 복원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만날 여덟 편의 고딕-스릴러 소설이 사회적 약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세계 속의 불안이 정확하게 발화되는 장이 되는 한편, 이 시대에 필요한 공감과 연대를 불러오기를 기대한다.

 평론가 강지희는 ‘발문’에서 에이드리언 리치의 말을 빌려 이 여덟 편의 소설을 “극단적인 상태에 대한 소설”이라 칭한다. 소설 속의 비현실적 목소리, 유령, 환각 등은 소설의 끝까지 규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남아서 하나의 지표가 된다. 누군가 이전에 여기 있었다는 신호가 된다. 그것은 미약하게나마 불균형하고 불합리한 방식으로나마 연대의 가능성이 된다. 이 소설집이 지금 이곳에 남기는 궤적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여성의 기록들로 남기를, 그리고 독자들이 아주 적합한 방식으로 이 소설들을 읽어내주기를, 그렇게 연대의 가능성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강화길, 손보미, 임솔아 외 '사라지는건 여자들뿐이거든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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