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사흘 뒤 무조건 떠나야 한다. 너희 조선인들에게 이주 명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700여 호가 넘는 집집을 돌아다니며 일주일 치 식량과 당장 입을 옷가지만 챙겨 혁명광자에 모일 것을 명령했다. (...)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는 우리 다 같은 운명이지만 열차에서 내려서는 뿔뿔이 흩어져 다른 운명으로 살아아겠지"

 

읽는 이의 마음에 자국을 남기는 작가 김숨. 그의 집요함과 세심함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힘과 서사의 밀도는 독자와 평론가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많은 에너지와 감정 소모를 필요로 하는 작품을 써내며 쉼표 하나, 말줄임표 하나에도 온 마음을 쏟는 그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써내려간 문학의 자리엔 숭고함이 남는다. 일본군 위안부, 입양아, 철거민 등 소외된 약자와 뿌리 들린 사람들을 보듬어왔던 그가 이번 작품에선 '디아스포라'를 노래한다. 집필 기간 4년, 소설가 김숨이 1년 9개월 만에 장편 '떠도는 땅'을 내보인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김숨. 2020년 올해로 등단 23주년을 맞은 김숨은 인간 존재의 근원과 존엄성에 대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문단과 독자의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인간 존엄의 역사를 문학으로 복원해온 그가 한국문학장(場)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번 신작은 고려인의 150년 역사를 응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떠도는 땅'은 1937년 소련의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 17만 명이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화물칸이라는 열악한 공간을 배경으로 열차에 실린 사람들의 목소리, 특히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디아스포라적 운명을 이야기로 확장시킨 이 소설은 슬픔과 그리움이 고인 시간을 걸어온 고려인들의 비극적 삶, 그리고 오랜 시간 '뿌리내림'을 갈망했던 그들의 역사를 핍진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총 4년이 걸린 작품으로 격월간 문학잡지 'Axt'에 연재했던 소설을 2년 6개월 동안 개고했다.

소설가 전성태는 '떠도는 땅'을 두고 “한 번도 개인의 발화를 박탈하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주인 없는 목소리가 되어 인간의 운명을, 여성의 수난을 울림 있게 노래한다”고 평했다. 김숨은 비극적인 역사에 매몰된 인간의 숭고함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내며 “뿌리를 잃고 떠도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이 소설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고, 더 나아가 우리 주변, 경계에 놓인 사람들의 떠도는 삶까지도 다시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김숨의 '떠도는 땅'에서
 

저작권자 © 뉴스앤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