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그렇지만, 나는 가까스로 생긴 친구들 눈에 지나치게 심각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자애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할머니가 막 생리를 시작한 나에게 생리대를 사주기 위해 슈퍼에 갔지만 탐폰들만 잔뜩 있는 진열장 앞에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라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긴긴 하루를 견디다 지루해지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일본식품점에 가지만 일본인 주인과 유창하게 의사소통할 때마다 자긍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는 사실 역시 미처 알지 못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는, 피해 사실을 고발한 이후 30년 가까이 여성 인권 향상에 힘쓰다 “나는 희망을 잡고 사니 내 뒤를 따르라”라는 말을 남긴 채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처럼 여성에 대한 범죄와 폭력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지금-여기’에서 여성이 마음 놓고 희망을 붙들고 살기란 여전히 난망한 일이다. 

더욱이 ‘할머니’는 여성주의 담론에서조차 주변부에 머물며 현실에서까지 약자를 향한 까닭 없는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여 ‘희망’을 유언으로 남긴 김복동 할머니처럼, 눈앞에서 떠드는 충고나 조언보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으로 소곤소곤하게 희망을 말하는 할머니란 존재는 더없이 소중하다. 이러한 할머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리라는 것, 이런 게 살아 있다는 것”(강화길, '선베드')이고, “그 우여곡절과 슬픔과 상처로 인해 인간이란 이렇듯 사랑스러운 존재”(오정희, 추천의 글)라고 말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의 할머니에게'는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지만, 어려운 시절을 충실히 살아낸 우리 시대의 소중한 어른으로서 ‘할머니’들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한국 문단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 중인 여성 작가 6명(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이 유해한 시대를 무해한 사랑으로 헤쳐 나온 이들의 믿지 못할 삶의 드라마를 각자의 고유한 감각과 개성으로 그려냈다. 

가족의 의미가 흐려져가는 시대에도 부모를 대신해 우리를 키우고 보듬었던 존재. 가족을 위해, 또 여성을 억누르는 부당한 세상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도 한 시대를 오롯이 버텨낸 역사의 증언자. 떠올리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단어. “틀림없이 우리 곁에 있어왔지만 정확하게 응시된 적은 없었던 여성들”(황예인, 발문)인 할머니에 대한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문학평론가 황예인은 “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과거와의 연결이면서 우리의 미래를 알아차리는 과정이 되기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좌충우돌하며 성장하는 어린 여성들, 연대의 힘을 깨닫고 용감해진 성숙한 여성들. 여기에 나이 든 여성들을 함께 놓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이전보다 선명해진 할머니라는 존재가 서로 간의 이해와 소통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줄 것이라는 점이다. 소설가 오정희 역시 이 작품들이 “노년에 대한 통념과 편견을 깨뜨리고 섣부른 달관과 체념과 화해라는 해결책을 거절하면서 대신 삶의 불가해함과 인간 존재라는 신비를, 한세상을 건너가면서 겪고 감당했던 그 모든 것들의 곰삭은 향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라고 추천의 글을 통해 밝혔다.

팍팍한 현실을 홀로 감내하며 살다가도 어쩐지 울컥해질 때, 거칠고 말랐지만 따뜻했던 두 손을 부여잡고 싶을 때, 이미 어른이지만 아직 미성숙하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우물쭈물하며 삶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려는 당신에게 이 책은 반짝이는 이정표이자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경이로운 위로를 건네줄 것이다. 강선영 ksy@newsnbook.com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외 '나의 할머니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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