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월대와 난간석 동구릉에 남아있다" 학술지 발표
"광화문 월대와 난간석 동구릉에 남아있다" 학술지 발표(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 고종이 1866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는 정문인 광화문 앞에 넓은 단인 월대(月臺)를 조성해 왕의 위엄을 드러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고 광화문 앞으로 전차가 다니면서 월대는 1925년 무렵 철거됐다. 월대 좌우에 있던 ‘난간석’과 월대로 이어지는 경사로가 왕의 길임을 표시하는 ‘용두석’ 등이 없어졌는데, 사라진 석재들이 조선왕릉인 경기도 구리 동구릉에 남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9일 학계에 따르면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전나나 학예연구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계간 학술지 ‘문화재’ 최신호에 실은 논문 ‘경복궁 광화문 월대의 난간석 복원에 관한 고찰’에서 일제강점기 사진 자료와 광화문 앞에 남은 난간석, 동구릉에 있는 석조문화재를 비교·분석해 상관관계를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전 연구사는 조선왕릉 석조문화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다.

그는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 석물의 시대적 양식을 분석하고 이를 1920년대 광화문 사진과 비교, 연구해 월대 위에 설치된 난간석을 확인했다. 난간 한 쪽은 난간의 기둥 역할을 하는 돌인 난간석주(欄干石柱) 20점과 횡렬로 두는 기다란 석재인 죽석(竹石) 19점, 죽석을 받치는 돌을 어린아이 모양으로 조성한 동자석(童子石) 19점으로 이뤄졌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현재 광화문 앞에는 국립민속박물관 인근에서 가져온 난간석주 1점이 있다. 전 연구사는 이에 대해 “근대 사진에 보이는 광화문 월대 석물과 형태가 같아 고종 당시 제작된 난간석 원형으로 여겨진다”고 분석했다.

만약 동구릉에 보존된 석물이 실제 난간석으로 밝혀지면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 조성과 맞물려 추진하는 광화문 월대 복원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 연구사는 석재들이 동구릉으로 이전된 시기에 대해 “광화문 월대는 1923∼1925년에 전차 선로 개설과 도로 정비 등 이유로 해체됐다”며 “조선총독부 청사가 건립되면서 경복궁 어딘가에 모여 있다가 1940∼1970년대에 옮겨진 것 같다”고 추정했다.

동구릉에 있는 난간석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전 연구사는 1897년 선포된 대한제국 시기의 난간석주와도 비교했고 유사점을 찾아냈다. 그는 “환구단, 칭경기념비각, 덕수궁 금천교 등 대한제국 시기 난간석주와 동구릉 난간석주는 모두 상단이 세모꼴에 가깝고, 그 아래 사다리꼴 받침이 있다”면서 “광화문 월대 난간석주로 보이는 동구릉 석재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설치된 난간석주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동구릉에 있는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용 머리 모양의 용두석 한 쌍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문양과 형태를 검토했을 때 광화문에서 비롯된 석물임이 확실시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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