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다른 풍경들이 새삼스레 그리운 시기이다. 국내 여행은 시도해봄직 하지만 상황을 핑계 삼아 떠나지 못할 여행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바쁜 일상에서 위안을 얻는다. (어차피 못 간다는 말이다) 정 답답할 땐 어디론가 나를 대신해서 훌쩍 떠나버리는 영화를 보는 편이다. 장률 감독이 한국에서 찍은 ‘여행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경주>, <군산>, <후쿠오카>는 이러한 상황에 딱 맞는 영화이다. 다만 이 영화들은 전체가 하나의 꿈처럼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영화가 선사하는 어떤 해방감은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모두 한번쯤 감상하길 권하지만, 여기서는 <경주>를 중심으로 장률의 영화 세계를 더듬어 본다.

목진태 블루프린트북 대표
목진태 블루프린트북 대표

 

영화가 하나의 꿈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여행자 최현(박해일)의 과거와 기억들이 현재와 뒤엉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선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경주를 찾은 최현은 그곳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사건과 풍경들을 마주친다. 하지만 꿈과 현실의 도식적인 구분은 <경주>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다. 무엇이 꿈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그 근거가 희미할뿐더러, 어떤 마법 같은 순간들은 명확하게 구조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현과 여정(윤진서)이 슈퍼 앞에서 쉬고 있을 때, 근처 점집에서 한 노인이 여정을 부른다. 다음날 최현은 똑같은 점집을 들른다. 그곳에는 전날 봤던 노인이 아니라 웬 젊은 여자가 그를 맞이하고, 최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를 뜬다. 그가 전날에 본 노인이 점집을 물려주고 돌아가신 그녀의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최현은 관광 안내소의 직원(정인선)에게 물살이 아주 센 천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안내원은 그곳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최현은 분명히 어디선가 물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영화의 말미에 최현은 완전히 메말라 자취만 남은 천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가 징검다리에 앉아 메마른 바닥을 보는 순간, 물이 흐르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그는 기억 속에서 물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 소리는 실제로 그가 감각하는 현실로부터 오는 것 같다. 우리가 꿈이라고 생각했던 환상들은 부지불식간에 최현의 현실에 나타난다. <경주>는 시퀀스와 장면이라는 구조적인 요소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를 보면 볼수록 환상들은 그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점집 노인과 물소리는 경주에 있는 바로 그 장소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최현‘의’ 꿈이 아니라, 어떤 계기로 인해 최현‘에게’ 주어진 꿈이다.

장률감독의 '경주', '후쿠오카', '군산'
장률감독의 '경주', '후쿠오카', '군산'

이를테면 <경주>에서 최현이 본 풍경들, 경주 거주민들의 개별성은 최현의 개별성으로 전이된다. 천마총 앞에서 키스하는 어린 연인은 최현으로 하여금 전 연인이었던 여정을 부르게 만든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먼 거리를 순식간에 건너온 그녀는 최현이 모르는 아픈 과거를 힐책하듯 알려주고 금방 돌아가 버린다. 그녀는 최현의 현실에 차라리 소환됐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수도 있겠다. 최현은 어느 모녀가 동반 자살한 사건을 형사인 영민(김태훈)을 통해 우연히 듣는다. 이 모녀는, 최현이 여정을 보낸 후 공원에서 만났던 모녀, 그리고 여정과 그녀가 지운 최현의 아이와 묘하게 연결된다. 여기서 경주는 죽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공간으로 묘사되는데, 경주의 기억은 최현의 그것과 어느 순간 구분이 모호해진다.

장률의 영화에서 꿈-환상을 통해 드러나는 감각은 그 장소에만 국한된 개별성을 희미하게 만든다. 꿈-환상은 어느 장소를 방문한 사람에게 그곳의 알레고리가 소환한 잠재적 현실이며, 그것은 장소에만 귀속된 것을 개인의 것, 혹은 민중 전체의 일상적 맥락으로 돌려놓는다. 여기서 누군가는 자신이 가보지 못한 곳(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어떤 공간)에 대한 환상을 현실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자신의 주변으로부터 고인을 느낀다.

보르헤스 '픽션들'
보르헤스 '픽션들'

 

장률은 영화적으로 보르헤스에 다가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보르헤스는 소설집 <픽션들>에 실린 그 유명한 단편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시간의 미로를 상상한다. 누군가 내리게 되는 어떤 선택 앞에서 시간의 차원은 두 갈래의 길로 갈라진다. 다른 선택 앞에서 길은 또 갈라지고, 그렇게 길은 무한히 갈라지는 시간의 미로를 형성한다. 영겁회귀의 개념을 따르면, 삶은 미로 속에서 변형된 형태로 끝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반복적으로 미로를 해매는 존재들을 서로 만나게 하기도 하고, 다른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것이 무한히 지속되어 꿈의 총계가 형성될 때, 단 한 명의 역사는 인류 전체의 역사와 다름 아니게 된다.

장률의 영화는 잠재적 현실을 소환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들을 모아놓은 보편적인 지평, 거대한 바깥을 상정한다. 그곳은 어느 곳을 방문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개인에게 소환될 수 있는 차원에 놓여있다. 그의 여행은 미로 속을 해매는 하나의 삶의 형태이고, 어떤 우연한 계기를 통해 무한히 형성되는 다른 삶의 형태와 마주칠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미로를 형성하는 무한한 잠재적 현실의 합, 여행자에게 꿈-환상은 바로 이 너른 지평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장률의 여행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 여행을 멈출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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