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형제>로 유명한 위화는 중국 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처음 <살아간다는 것>으로 출간 된 이 작품은 1994년 장이모우 감독에 의해 <인생>이란 이름으로 영화화 되었는데 그 유명세를 차용, 지금은 영화의 제목으로 재출간 되었다. 위화의 작품에은 우리가 잘 몰랐던 중국의 근대사가 무서울 정도로 세세히 담겨 있다. "현실을 늘 긴장 속에 바라보며, 그에 대한 마음 속의 분노가 수그러지면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한 채 그리는게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는 그의 말 속에 집필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의도대로 저자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생의 환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격동의 세월 속에 가혹한 삶을 살아간다.​

신현종 조선일보기자
신현종 조선일보기자

그는 말했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내가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그의 작품은 충분히 '고상'하다. 소설이라면 으례히 등장하는 빌런도 절대악을 향한 주인공의 분노도 없다. 그런데 그 씁쓸한 고상함이 더 강하게 독자의 마음을 친다.

이야기는 농촌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수집하는 한 사내로 시작한다. 농민들의 노동요를 듣기 위해 여기 저기 농촌을 찾아 다니던 이 사내는 여름이 시작될 무렵 근처 밭에서 소에게 훈계를 하고 있던 노인 푸구이를 만나게 된다. 거무스름한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이 가득하고 그 주름 골마다 진흙이 가득 들어차 있는 노인은, 잠시 쉬는 틈을 타 잎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 아래서 사내에게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만석지기의 외아들이었던 푸구이는 말그대로 망나니였다. 어려서부터 그 기질이 남달랐는데 서당에 갈때도 발에 흙 한번 묻히는 법이 없었다. 집에 있는 일꾼이 서당까지 업어서 데려다 주면 마치고 나서도 다시 등에 타 출발의 신호로 일꾼의 머리를 여지없이 때렸다. 푸구이를 가르치던 나이 많은 훈장님은 아버지에게 "댁의 도령은 크면 틀림없이 건달이 될거"라 장담을 했다. 

커서는 성안에 가는 걸 좋아해서 열흘에서 보름은 집에 들어가질 않았다. 늘 기생집에 기거하며 경박한 여자들이 밤새 교태부리며 내는 신음소리를 즐겨 들었다. 기생과 도박은 팔과 어깨처럼 이어져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지라 여지없이 도박에도 빠져 들었다. 그날 그날 되는 대로 살다보니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는데 그 와중에도 도박만은 달랐다. 도박장에서 전해지는 통쾌함과 긴장감은 너무도 특별한 것이어서 어느샌가 푸구이는 도박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

소문난 부자집의 아들이니 일찌감치 장가도 갔다. 그의 아내 자전은 성안에 있는 미곡상집 딸이었는데 용모가 수려했다. 돈 있는 집 딸이 돈 있는 집에 시집을 오니 돈이 쌓이고 쌓여 흘러 넘쳤다. 밖으로만 나돌던 푸구이는 늘 착한 아내인 자전을 무시하고 모욕했는데, 그녀는 단 한 번도 말대꾸하는 법이 없이 정성껏 지아비를 모셨다.

푸구이는 바깥 나들이를 할 때도 자신의 발로 걷는 법이 없었는데, 기생집의 기생 중 제법 뚱뚱한 기생을 골라 자신을 업게 한 뒤 늘 그녀를 말처럼 타고 다녔다. 기생의 등에 업혀 장인어른의 미곡상을 지날 때면 기생의 머리채를 잡아 당겨 멈추게 하고는 늘 큰 소리로 장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장인의 얼굴은 쑹화단처럼 시커멓게 변했는데, 그 모습이 재미있어 항시 인사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렇게 엉망인 푸구이의 돈을 노름꾼들이 빼앗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인생
인생

쉬씨 집안의 땅은 백묘가 넘었다. 푸구이의 아버지는 성안까지 이어지는 자신의 넓디 넓은 땅을 바라보며 짐승처럼 들판에서 똥을 누는 것을 즐겼다. 그사이 망나니 아들은 실로 놀라운 속도로 집안의 재산을 바닥냈다. 제법 큰 판으로 마지막 남은 재산을 날리기 직전, 아내 자전이 뱃속에 아이를 밴 채로 도박장에 찾아와 집에 돌아가자고 무릎을 꿇었을 땐 재수가 없다며 아내의 뺨을 두 대나 때렸다. 너무나 힘있게 때려 자전의 머리가 땡땡이 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렸는데도 그녀는 가지 않았다. 이에 푸구이는 자전의 머리카락이 다 헝클어지고 흐른 눈물이 얼굴을 다 가릴 때까지 흠씬 때린 후 사람을 시켜 도박장에서 끌어냈다. 그 당시 아내의 뱃 속에는 첫째 딸 펑샤에 이어 아들이 들어 있었는데, 매를 맞은 부인은 산만한 배를 하고 어두운 저녁 십리가 넘는 길을 울며 집으로 돌아갔다. 

자전이 끌려 나간 그 저녁,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푸구이는 남아 있던 모든 돈을 잃었다. 푸구이가 노름에 사용한 주사위는 이미 구멍이 뚫려 수은이 주입되어 있던 것으로 노름의 결과는 애저녁에 정해져 있었다. 

노름으로 모든 재산을 날린 푸구이는 대궐같은 집에서 초가집으로 이사를 해야했다. 이사하던 날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볼일을 보러간 아버지는 그만 똥통에 미끄러져 죽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열흘째 되던 날 초가집으로 울긋불긋한 꽃가마와 장정 열명이 따라 들어왔다. 장인이 자신의 딸인 자전을 데리러 온 것이다. 장인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딸을 가마에 태우고 풍악을 울리며 동네 사람 보란듯이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

자전이 떠난 후 집안의 물건이란 물건은 다 팔아치워 가며 끼니를 연명했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푸구이의 어머니와 어린 첫째 딸 펑샤는 생계를 위해 나물이라도 캐야만 했다. 그렇게 근근히 끼니를 이어갈무렵 아내 자전이 생후 6개월 된 아들 유칭을 데리고 돌아왔다. 자전은 부유한 미곡상의 딸이었지만 모든 걸 버리고 푸구이에게 돌아온 후, 어머니와 아이들을 보살피며 집의 생계를 도맡았다.

그러한 생활을 일 년쯤 이어갈 때 어머니에게 병이 생겼다. 푸구이는 성안으로 급히 의원을 모시러 갔는데 누런 옷을 입은 국민당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갑자기 전쟁터에 끌려간다. 급박하게 변모하는 중국 근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전쟁이라하지만 적의 포탄에 의한 죽음보다 아사가 더 가까웠던 시절, 푸구이는 바뀐 전세에 해방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와보니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뒤였고 아내 혼자 옛 초가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푸구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구이는 첫째 펑샤도 둘째 유칭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지만, 펑샤는 일 년 전 열이 크게 올랐을 때 청력을 잃어 이미 귀머거리가 되어 있었다.

푸구이가 마을에 돌아 왔을무렵, 토지 개혁이 시작되었다. 푸구이는 최종적으로 다섯묘의 땅을 배분받아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외아들 유칭을 학교에 보낼 시기가 되었는데 도저히 여력이 되질 않자 먹는 입이라도 줄이려 첫째 딸 펑샤를 다른 집에 보내기로 했다. 말을 못하니 받아 준다는 집이 없어 최종적으로는 나이 많은 부부의 시종으로 딸을 보냈다. 말 못하는 펑샤는 몸을 부르르 떨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노인의 손에 이끌려 집을 떠났다.

평샤가 집을 떠나고 몇 개월 후 한밤 중에 누가 문을 두드렸다. 평사가 그 집에서 도망쳐 온 것인데 말 못하는 펑샤는 펑펑 울면서도 엄마, 아빠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자신을 다시 돌려보낼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칭을 학교에 보내야만 했기에 푸구이는 펑샤를 다시 데려다 주기 위해 업고 그 집 근처까지 가 내려 놓았다. 헤어지는 순간, 말 못하는 펑샤는 눈을 크게 뜨고 아빠의 얼굴을 말없이 계속 매만졌는데 그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푸구이는 펑샤를 도로 업고 온다.

이렇게 가난하지만 네 식구는 서로 의지하며 삶을 이어갔다. 그 당시 푸구이는 양을 두마리 길렀는데 유칭은 매일 아침 동이 틀 무렵 낫을 넣은 광주리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을 비비며 풀을 베러 다녔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찍 일어나 산에 가서 풀을 베고 학교가 있는 성안으로 달려가곤 했는데, 점심시간이면 다시금 집에 돌아와 양들을 위한 풀을 베고 학교에 가야만 했다. 매일 매일을 오십리가 넘는 길을 뛰어 다녔다.

그렇게 뛰어 다니니 신발이 빨리 헤질 수 밖에 없었는데 가난했던 푸구이는 신발이 빨리 닳는 것을 보고 유칭의 귀를 잡아당기며 신발을 아껴 신으라고 호되게 나무랐다. 그 뒤로 유칭은 풀을 베러 갈때는 맨발로 다니고 학교 앞에 가서야 신발을 신었다. 더 이상 신발을 닳게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인민공사가 들어서자 모두의재산은 하나라며 유칭의 양 두마리를 데려간다. 오십리를 마다 않고 내달려 키운 양을 빼앗긴 것이다. 유칭의 낙담은 이루 말 할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칭이 학교에 갔는데 학교 교장, 그러니까 현장댁 부인이 아이를 낳다 피를 많이 흘려 위독한 지경에 이르른다. 그러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빨리 헌혈을 하러 병원으로 갈 것을 명한다. 달리기가 빨랐던 유칭은 제일 먼저 병원에 도착, 우연치 않게 혈액형이 일치 해 수혈을 하게 된다. 현장댁을 살려야하는 의료진은 유칭의 팔에서 피를 계속 뽑았고 유칭은 어지럽다며 힘듦을 호소했지만, 누구 하나 관심이 없었다. 급기야 헌혈하던 유칭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어른들은 피 뽑기를 멈췄는데, 그 때 유칭의 심장 박동은 이미 멈춰 있었다. 병원에 와 아들의 시신을 가져가라 전해들은 푸구이는 피를 다 뽑아 솜털처럼 가벼워진 유칭의 시신을 안고 가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 묻었다. 

그 와중에 아내 자전의 건강 상태도 나빠졌다. 부유한 집의 귀한 딸로 자라왔으나 홀 몸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잘 먹지도 못한 탓에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푸구이는 유칭의 죽음으로 아내가 더 오래 살지 못할까 걱정이 많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내는 죽을 힘을 다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푸구이는 말은 못하지만 아리따운 처녀인 첫째 딸 펑샤가 시집 한 번 못 가보는 것이 늘 애닳았는데, 드디어 펑샤에게도 혼처가 들어왔다.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은 완얼시라는 남자였는데 그 품성이 좋았다. 다행이 형편도 좀 괜찮았는데, 얼시는 아름다운 펑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다. 결혼 후 얼시는 아픈 장모도 살뜰히 챙기고 아이도 가지는 등 제법 따뜻한 가정을 이뤄 갔는데, 그만 아이를 낳던 펑샤가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출산 직후 죽고 만다. 

펑샤가 죽고 세달이 되지 않아 아내 자전도 세상을 떠났다. 푸구이와 사위 얼시, 그리고 외손자 쿠건, 이 세 명의 남자만이 남겨진 가족의 전부였다.

얼시는 젖동냥을 하고 온종일 아이를 업고 일하며 열심히 쿠건을 키웠다. 사위가 바쁠때는 푸구이가 쿠건을 돌봤다.쿠건을 위해 수레를 끌며 열심히 일하던 얼시는 쿠건이 네 살 되던 해에 시멘트 판 사이에 끼어 죽었다. 수레에 실려 있던 시멘트 판 네 개를 끌어 올리던 기중기가 실수로 시멘트판을 놓쳐 얼시를 깔아 뭉개고 만 것이다. 얼시는 "쿠건!"이라는 큰 소리를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죽었다.

혼자 남겨진 쿠건을 보는 건 마음 아팠지만 푸구이에게 쿠건은 남은 삶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푸구이는 온 힘을 다해 쿠건을 돌봤다. 그러던 어느 날 쿠건이 열이 나고 아팠다. 푸구이는 열심히 생강차도 끓이고 죽도 끓였다. 그러자 아팠던 쿠건은 금새 차도를 보였다. 평소 워낙 먹지를 못했던 탓에 죽을 먹자 호전 된 것이다. 푸구이의 형편은 어린 아이 하나도 배불리 먹이지 못할만큼 어려웠다. 쿠건이 나아지자 밭으로 일을 나가려던 푸구이는 아픈 아이를 혼자 남겨 두고 가는게 몹시도 마음이 아팠다. 이에 푸구이는 집안에 남아 있던 곡식인 콩에 소금을 넣고 푹 삶았다. 배고픈 아이에게 콩이라도 실컷 먹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의자를 쿠건이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옮긴 뒤 콩이 든 솥을 그 옆에 놓아 주었다. 잠에서 깬 쿠건이 먹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푸구이가 나간 후 일어나 콩을 본 쿠건은 씨익하고 웃었다. 

푸구이가 일을 마치고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 오니 쿠건이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입을 반쯤 벌리고 죽어 있었다. 쿠건은 콩을 보자 신나서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려다 기도가 막혀 죽은 것이다. 쿠건의 입술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민요를 수집하던 사내에게 푸구이는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언제 죽어도 걱정이 없었다. 예전처럼 자신이 죽고 난 후 남겨질 누군가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연고가 없으니 마을 사람 중 누구라도 자신의 시신을 거두어 주는 사람에게는 베게 밑에 준비해 둔 십위안을 가져라가는 말도 전해두었다.

푸구이는 쿠건이 죽은 다음 해에 소 한마리를 살만큼 돈을 모았다. 그리고는 여생이 이 삼년 밖에 남지 않은 늙은 소를 샀다. 그정도 시간이면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밭일도 하며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날 푸구이와 소가 서있던 들판은 서서히 어둠에 잠겨 갔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부름의 자세다. 매일 대지가 어둠을 부르듯이.

위화의 소설을 읽고 나면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먹먹하다. 푸구이의 인생이 이처럼 가혹했던 것은 그가 젊은 날 망나니로 살았기 때문일까? 그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공산 혁명 당시 지주였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만일 그가 인생의 어떤 한부분에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와 그의 식구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용돌이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중국 근대사에서 한사람 한사람의 선택이 무언가를 바꾼다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살아내야 했던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위화의 소설은 그의 말대로 고상하다. 하나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한발짝 떨어져 모두의 삶을 담담히 기록한다.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 이름만이 달랐을 수 많은 푸구이가 중국의 역사에, 우리들의 삶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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