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이어진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떠난다 하더라도.

묘지지기로 살아가는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비올레트다. 비올레트가 처음부터 묘지지기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비올레트 투생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녀는 건널목지기였고, 기차 시간에 맞춰 차단기를 올리고 내리는 일을 했다. 이따금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 기차 안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건널목지기였던 그녀는 어떻게 묘지지기로 살게 되었을까.

이예은
이예은

묘지지기로서의 그녀는 단순히 묘지를, 죽은 자들이 묻혀있는 곳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일부를 그곳에 묻는다고 해서,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그들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남겨져 있는 곳을 쓸고 닦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묘지에 적혀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가끔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슬픔에 젖은 사람들이었다. 불쑥 찾아오는 이들에게 비올레트는 차를 대접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처음 보는 그녀에게 자신의 비밀조차도 쉽게 털어놓았다. 비올레트는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그들이 묘지로 올 때마다 그 날의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 언젠가 찾아올 이들이 그 때의 순간을 물을 때, 무언가 답할 수 있도록, 그 기록을 보여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 기록은 대체로 이랬다. 날씨가 어땠는지, 누가 참석했고, 그들은 어떠했는지, 추모식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추모사는 어땠는지. 대부분은 슬픔에 가려 그 순간을 잊어버리고 마니까.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을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되도록 상세히 기록하려 했다.

비올레트는 꽃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꽃도 팔았다. 묘지 앞에 꽃을 놓고 싶은 이들은 종종 비올레트에게서 꽃을 샀다. 주인을 잃은 강아지, 고양이들도 돌보았다.

묘지 근처 그녀의 집 뒤편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그곳에는 생명이 가득했다.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곳, 집을 사이에 끼고 한 쪽은 죽음이, 반대쪽에는 생명력이 가득하다니, 이런 상황이 아이러니했지만 그게 삶이구나 했다. 수많은 죽음을 매일 목격했다. 일이 없는 날도 있었지만, 죽음이 없는 날은 없었다. 가끔 살아있는 게 누구인지, 떠난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순간에도, 정원 일을 하다보면 살아있다고 느끼게 됐다. 그게 좋았다. 마침내 끝끝내 열매를 맺고 마는 토마토가. 초록 초록한 생명들이 그녀를 낫게 했다, 나아가게 했다. 버티게 만들었다.

'비올레트, 묘지지기'
'비올레트, 묘지지기'

모든 게 무너져버린 순간에도 그녀를 살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묻혀있는 이들 중 한 명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비올레트는 생각했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이도 자신이 아닐 터였다. 누워있는 이들 중에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저마다의 생은, 저마다의 이유로 고통스러웠고, 불행했다. 물론, 가끔 찾아오는 반짝이는 행복이 있었다. 저마다 붙잡고 사는 것들은 달랐지만, 죽음 앞에서 다른 것들은 무의미했다. 사랑만이 남았다. 소중했던 이들이 떠나고 난 이후에도 사랑만이.

어떤 이야기는 길어서 행복하다. 이 소설이 그랬다. 상실에서 회복으로의 여정, 버텨낸 삶의 위로와 살아나갈 용기에 대하여,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났다. 스며들 듯이 마치 책의 연장선인 것처럼 먹먹히 스며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비올레트가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그녀가 소중하게 여긴 이도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까. 다시 알게 된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이고 결국 마주하는 것은 자기 앞의 생뿐이라는 것을.

책을 덮으며 처음 마주했던 질문과 다시 만난다.

“당신에게도 있나요, 당신을 살게 하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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