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보라, 노동의 색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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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보라, 노동의 색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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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31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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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보라'의 윤리와 아도르노

이강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보라>(2011)는 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의 근로자는, 해당 사업장의 보건관리 업무를 맡은 산업안전 전문의에게 3개월에 한 번씩 보건관리를 받도록 되어있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공장에서 보건관리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시작한다. “올 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술은 하루에 얼마나 드세요?” 등의 질문이 오가기도 하고, 현장 위험요소를 지적하는 점검 활동도 벌어진다. 하지만 별안간, 이강현의 카메라는 점검의 현장에서 시선을 돌려 이상한 곳으로 향한다.

목진태 블루프린트북 대표
목진태 블루프린트북 대표

보통 보건관리를 위한 면담에서 전문의를 잡아야하지만, 카메라는 시선을 돌려 멀리 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노동자를 관찰한다. 공장 현장점검 장면에서는 공장 관리자와 안전점검자, 즉 화자가 화면에 중심에 있어야 하지만 역시 카메라는 시선을 돌려 공장에서 위태롭게 작업하고 있는 노동자로 향한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카메라는 시작부터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시야의 중심에 놓고 대상을 향해 고개나 시선을 돌린다. 영화도 마찬가지여서, 감독을 매혹하는 어떤 대상, 말하고 싶은 중요한 요소를 장면의 중심에 놓기 마련이다. 이럴 때 대사나 대화는 중요한 게 아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한계와 이를 잘 준수하지 않는 현장의 실태를 고발하는 듯 했던 영화는 무엇을 보고 싶은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고통을 내제화한 노동과 노동자의 이미지 그 자체이다.

사실 이는 동시대 많은 영화가 취하고 있는 윤리적인 자세이기도 하다. 많은 사상가의 논의를 참고할 수 있겠지만, 여기선 대표적으로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논의한 내용을 참고한다. ‘아우슈비츠 이후 시는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했던 아도르노는 당시 대중문화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영화 매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예술이 상품화되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대중에게 소극적인 수용만을 강조하는 ‘문화산업’의 첨병이 영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모든 대중매체나 예술을 부정하진 않았다.

아도르노를 위시한 현대철학자들은 무엇보다 두 차례의 커다란 전쟁과 제노사이드의 원인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안이나 사물을 객체(object)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원인과 목적을 상정하여 이해하려 하고, 이해를 마치면 손쉽게 대상을 정복하여 망각한다는 것이다. 가령 노동자들의 고통을 산업안전보건법이라는 제도적인 틀로 분석하는 순간, 그것을 준수하지 않는 경영자들을 탓하기는 쉬워도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하고 사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준과 규제를 강화하거나 준수하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우리는 노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노동자들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을까?

계몽의변증법
계몽의변증법

 

아도르노는 모든 대상(자연)을 ‘주체(subject)’로 보고, 이들과의 ‘화해 불가능성’을 주장했다. 어떤 관점이나 가치관으로 무언가를 관찰하는 대신, 그 자체(itself)를 보고 이해할 수 없는 공백과 간극을 두자는 것이다. <보라>에서 이강현 감독의 카메라가 시선이 도달하는 곳은 산업안전보건법의 기준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와 그것을 봄으로써 우리 안에서 감각되는 고통인 것이다. 이후의 장면들에서 카메라는 본격적으로 노동자들의 노동 장면을 탐닉한다. 공장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작업에 몰두하는 노동자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숭고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감각된다. 이는 제도를 개선한다고 완전하게 해결될 수 없는,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와 결부되는 요소인 것이다. 이 이미지들에서 강조되는 것은 보라색 빛을 띠는 노동의 감각이다. 우리가 봐야할 것을 ‘보라’는 요청과 함께, 중의적으로 이강현 감독은 노동의 색을 보라색으로 감각했다.

이조차도 어떤 관점으로 고착화될 수 있기에 아도르노는 대상과의 끊임없는, 어쩌면 심연으로 빠져들 수 있는 불화를 강조했다. 혹자는 어떠한 사안도 해결하고자하는 의지를 잃어버릴 수 있는 허무주의, 염세주의를 우려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확히 반대이다. 이는 해결되지 않은 사안을 쉽게 망각하지 않고 응시하려는 윤리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정확하고 명쾌하게 진단하는 것보다, 이해하기 힘든 사안 앞에서 결론을 유보하고 재고하는 자세가 더 필요해진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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