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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번역가
서진석 번역가

지난 25년간 정체성 확립을 위해 유럽을 떠돌던 중 ‘지금까지 유럽에서 배운 언어로 살겠다’는 확신을 갖고 번역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서진석 번역가가 그 주인공이다.

서 번역가는 그 확신에 따라 여러 언어권의 번역을 맡았다. 대학에서 관련 강의를 진행할 정도로 언어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다.

그에게 번역가의 꿈은 없었지만 한국어를 제외하고 5개 국어를 구사함에도 써먹을 곳이 없어 소수 언어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번역 제의를 받았고 소수 언어의 지식과 구사력을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들어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에스토니아(Estonia)를 향한 애정은 더 깊다고 진하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발트 3국으로 불리는 에스토니아는 중세 유럽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나라다. 좋은 기회가 생겨 박사과정을 에스토니아에서 공부한 서 번역가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유럽 내 사회주의 국가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더 외진 발트 3국에 매력을 느꼈죠. 파란 하늘을 닮은 국기에 매료돼 에스토니아에 빠지게 됐습니다.”라며 첫 만남을 회상했다.

서 번역가가 에스토니아에 쏟은 열정은 그 결과물로 증명된다. 에스토니아 작가 오스카르 루츠(1886-1932)의 소설 'kevade;봄'의 번역본 ‘말썽꾸러기 토츠와 그의 친구들(출판사 문화의힘)’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한국과 에스토니아 수교 30주년을 맞아 에스토니아 문화기금 지원을 받아 출간된 이 책은 에스토니아어 문학을 한국어로 직번역해 소개하는 최초의 책이다.

그는 “에스토니아에서 유학을 시작한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책이 바로 ‘말썽꾸러기 토츠와 그의 친구들’입니다. 현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될 정도로 에스토니아에서는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품이에요. 저도 처음 느꼈던 감동과 재미를 잊을 수가 없죠. 당시에는 에스토니아라는 나라 자체가 안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느낌을 아무하고도 나눌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 책을 읽어본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약간 동질감 같은 것을 느낍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사진=문화의힘)
(사진=문화의힘)

서 번역가는 소설 속 주인공 ‘토츠’의 곁을 따라다니는 인물 ‘키르’에게 유독 관심이 쏠렸다. 어리숙한 성격의 키르는 토츠가 아무리 장난을 치고 못된 짓을 해도 주인공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행동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카르를 보고 마치 저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이 저에게 장난을 좀 많이 치는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어요. 그런 노력이 사회에서는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죠.”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100년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에스토니아에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소설이 가진 의미를 서 번역가는 “오스카르 루츠가 소설을 통해 당시 사회상과 역사의식을 가르쳐 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역사·사회 교과서처럼 들리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자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많이 사용했겠죠. 아무래도 소설 전체에 흐르는 반(反)독일 분위기가 소련의 이데올로기에서 많이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그만큼 당시 역사와 사회상을 뚜렷이 담고 있지만 단순히 재미있고 흥미로운 소설책으로만 읽히니 상당히 성공한 거겠죠.”라고 짚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에스토니아어로 쓰인 옛 어휘들을 이해하고 한국어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부분에 애를 먹은 것. 서 번역가는 “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도 많았어요. 단어의 의미를 찾기 위해 주한에스토니아대사관 공관차석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못 살게 굴었죠. 또 사회적 계층구, 종교 관료, 농장구조 등을 한국어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전부 분석하고 파고들어 용어를 정리해야만 했어요. 거의 에스토니아 역사를 새로 공부하는 기분이었죠. 공관차석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웃어보였다.

에스토니아어 문학 작품을 직접 선정해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그.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란 고민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서 번역가는 “'과연 이 책을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하는 점에서 사실 확신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이 작품 외에도 번역할 만한 재미있고 훌륭한 책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책을 골라 번역을 시작하자마자 어떻게 해야 공감을 시킬까 하는 점이 저를 계속 고민하게 했어요. 제가 공감의 형성을 위해서 억지로 책의 내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가능하다면 등장인물들의 특징과 성격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단어와 표현들을 최대한 잘 활용해야겠단 의미였죠. 한국인들로부터 얼마나 공감을 얻을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넌지시 말했다.

마지막으로 서 번역가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소수언어권 문학을 처음 접하는 계기가 될 것 같아요. 세계적으로 볼 때 에스토니아처럼 주류문학계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소수 언어 국가들이 많이 있는데, 이 책을 계기로 해서 작고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의 문학과 문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또 한국에는 아직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3국에 대한 강의가 없어요. 국내 대학교들에서 이 지역 국가의 문화와 문학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희망하며 말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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