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는 고도 성장의 시대였다. 일자리는 넘쳤고 수출은 호황이었으며 열심히 일해서 번 수익의 일부를 은행에 넣어 두면 원금보다 많은 이자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결혼과 출산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난 후 소득의 일부를 통해 빛을 갚아 나가다 보면 굳이 복잡한 재태크를 하지 않아도 자산의 증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사회에 은퇴할 즈음엔 자식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30~50대 시기는 자신보다 회사와 가정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였고 개인의 자아 성취나 쾌락 추구보다 가치 있는 삶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몇번의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개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성공이나 소비를 통한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기보다 개인의 가치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했으며 행복이 사회에서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될 수 있는 절대적인 의미로써 생각되기 시작했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보여지는 개인이 아니라 스스로가 행복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직업과 직장, 사회적 관계가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소비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가치를 훼손당하지 않으면서 삶을 보다 여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답을 찾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그들을 파이어족(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즉 경제적 자유를 조기에 획득하여 정상보다 이른 시기에 은퇴하고 남은 시간을 자신이 꿈꾸던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장기침체기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경제적 고통 없이 유년기를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미래는 그리 밝지만은 못하다. 밀레니얼 세대는 부담스런 학자금 대출과 불안한 취업현실, 자본주의의 양극화, 기성세대를 위한 과세 부담 등 그들의 미래를 답답하게 만드는 수많은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며 사회적 우울증을 극심하게 겪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은 또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오직 생존을 위해서만 소비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들 중 일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파이어족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파이어족이 추구하는 삶이 단순히 절약과 소비감소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수익의 대부분을 저축하고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행위는 경제적 자유를 조기에 얻기 위한 방법이라기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아야 하며 그들의 검소한 삶은 자신의 삶을 신중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지 타인의 경제활동을 상대적으로 비난하거나 그들만의 고립된 세상을 구축하려는 의도로 보아서는 안된다.

파이어족 스스로도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것으로 경제적 자립을 추구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투자를 통한 현금흐름 창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막연히 고수익 추구만을 위한 행동은 아니며 조기은퇴 후 인생설계 시 필요한 수준의 자금만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들에겐 자동차를 구매하거나 부동산을 매매하는 행위가 조기은퇴계획에 부정적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그 가치를 절하하고 그로 인한 불편함을 감수한다.

누구나 꿈꾸는 삶은 존재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삶을 건강하고 적극적으로 누릴 수 있는 시점과 주체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경제적 여유를 가지는 시점은 항상 차이가 존재하였다.

파이어족은 이들을 동일 시점에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일반인보다 좀 더 노력하는 사람들이므로 특별한 존재로 볼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충분히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행복을 어디서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만 하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심도 있게 고민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현실적인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는 모든 이들은 파이어족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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