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골라주는 여자] 기억이 사라져가는 섬, 그 안에 존재하는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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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골라주는 여자] 기억이 사라져가는 섬, 그 안에 존재하는 저항
  • 강선영
  • 승인 2021.10.0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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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요코의 '은밀한 결정' 출간
기발한 상상력으로 사회적 모순 지적

오가와 요코는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무라카미 하루키, 오에 겐자부로 등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번역 출간이 이루어지는 작가로 꼽힌다.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사물의 존재와 기억이 사라져가는 섬. 주기적으로 ‘소멸’이 일어나면 섬사람들은 그에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고,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강압적인 비밀경찰에 끌려가 사라진다. 소설가인 ‘나’의 어머니 역시 기억을 잃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이미 소멸한 물건을 지하 서랍장에 숨겨두고서 나에게만 남몰래 보여주며 어떤 물건인지 설명해주곤 했다. 

그런 어머니가 비밀경찰에 불려갔다가 시신으로 돌아오고, 들새 연구가였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 ‘나’는 가정부 할머니의 남편이자 페리 정비사였던 할아버지와 단둘이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아버지의 연구소에서 무릎에 앉아 쌍안경으로 들여다보던 색색깔의 새, 부모님이 젊은 연인이던 시절 자주 찾았던 장미정원의 꽃, 가족의 추억이 담긴 사진 등 주위를 채우던 소중한 존재들이 하나둘 소멸해가는 속에서도 상실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담담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나’는 자신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고 평가해주는 담당 편집자인 R씨 역시 소멸한 것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할아버지와 합심해서 집안에 작은 은신처를 마련해 그를 숨기는 데 성공한다. 

언젠가 R씨가 숨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는 작은 희망에도 불구하고 ‘소멸’을 철저하게 이뤄내려는 비밀경찰의 기억 사냥은 날로 심해져가고, 달력이 소멸한 탓에 추운 겨울날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섬에는 식량과 물자가 점점 부족해진다. 이윽고 소설마저 소멸하면서 ‘나’는 채울 길 없는 공허감을 느끼는데……
 

'은밀한 결정'은 SF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시공간이 명확하지 않은 배경과 의식주 묘사, 인물 간의 관계 등은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근미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땅과 바다에서 식량을 자급하고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로 기능하던 지난세기의 목가적인 시골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오가와 요코를 작가의 길로 이끌어준 십대 시절의 애독서 '안네의 일기'가 있었다. 자신의 내면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귀중한 자유임을 깨닫게 해준 이 책처럼, 소중한 존재를 부당하게 빼앗기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보자는 생각과, ‘기억이 소멸하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는 발상을 하나의 주제로 이어본 것이 '은밀한 결정'의 탄생 계기가 된 것이다. 

특히 나치 독일을 연상시키는 강압적인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책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분서 장면, R씨가 은신처로 이동하는 날 큰비가 내려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장면 등은 '안네의 일기'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다.

강선영 ksy@newsn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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