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와일드' 가 떠올랐다.

영화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는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던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파괴해간다. 하지만, 엄마에게 다시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그녀는 수 천 킬로미터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극한의 공간 PCT를 걷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몸만 한 배낭을 메고 트래킹을 떠난다. PCT는 미국 3대 트래킹 코스 중 하나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로, 국유림 25개, 국립공원 7개, 총 2659마일(4279km)에 달하는 지옥의 코스다. 여자 혼자 극한의 공간을 걸어 나가는 과정은 끝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자 고통의 연속이었다.

영화에서 나는 아름다운 자연보다는 셰릴의 힘겨움, 내적인 고뇌, 포기하고 싶다가도 걸어 나가는 장면들에 집중했다. 야생에서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야생동물의 위협도, 예측할 수 없는 기후도 큰 어려움이었지만, 트래킹 도중 마주치는 사람이 가장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셰릴이 자신을 겁탈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목숨 걸고 도망칠 때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쥐고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트래킹이 힘겨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트래킹 내내 때론 아픔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했고, 엄마를 전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며, 자기 스스로를 만나고, 다시 반짝거리던 엄마의 딸로서 스스로의 삶을 찾아나간다. 그 과정이 눈물 겹게 아름다웠다.

이예은
이예은

하지만 이 책, ‘나를 부르는 숲’ 의 빌 브라이슨의 트래킹 과정은 '와일드'와는 다르다.

물론 어려움이야 비슷했겠지만, 빌 브라이슨 특유의 유쾌하고 무겁지 않게 전달하는 호흡은 그의 내딛는 발걸음이 무거웠을지라도, 읽는 우리로 하여금 산뜻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따라 걷게 된다. 빌의 시선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숲을 떠올려보라. 초록이 가득하고, 피톤치드향이 가득 느껴지는 것만 같은 싱그러움, 마치 숲의 내음이 가득한 것 같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빌이 그랬듯, 셰릴이 그랬듯, 어떤 이유로, 어떤 계기로 트래킹을 떠나게 되는 걸까. 사실 영화에서도 책에서도 그 계기는 설명이 되어있다.

내가 트래킹을 떠나는 날이 올 것 같지는 않지만, 그들이 온 상념을 비우고 오로지 모든 감각을 ‘걷기’에만 집중하면서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은 부러웠다. 그것이 트래킹의 묘미가 아닐까. 그렇게 자신을 만난 사람의 삶은 그 전과는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꼭 트래킹이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고, 그렇게 삶의 방향을 설정해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있든 세상을 향한 그 사람의 삶과 시선은 다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트래킹의 과정을 39.5%, 1392km를 걷고 나서, 가끔 집 앞의 가까운 트레일로 등산을 다녀오며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상념에 잠기기도 하지만, 항상 어떤 지점에 이르면 숲의 감탄할 만한 미묘함에 놀라 고개를 들어본다. 기본적인 요소들이 손쉽게 모여서 하나의 완벽한 합성물을 이룬다.

어떤 계절이든 간에 눈길이 닿은 곳은 모두 그렇다. 아름답고 찬란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개량의 여지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 라고, 또한 우리는 그런 것들을 느끼기 위해 (물론 그런 경험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산 정상에 몇 킬로미터를 걸어 오를 필요도, 눈보라를 뚫고 기신기신 걸을 필요도, 진흙 속에서 미끄러지거나,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을 건너거나, 매일매일 체력의 한계를 느낄 필요도 없다고 말이다.

숲이 주는 시선은 마치 쉼표처럼 현재의 순간들에서 벗어나 멀리 바라보게도, 또 때로는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했던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이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다가도 가끔 숲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마다 조금씩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나를부르는숲
나를부르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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