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정확히 지나간 시간을 재현해내고 가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실한 증거들 앞에서 주저하게 되는 날들이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실한 증거에 의해 명명백백히 재구성된 듯 보이는 사실 앞에서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낀다. 그것은 희미한 증거를 더듬을 때와는 다른 모종의 주저함이다. 멀고 희뿌연 것을 더듬어 진실에 가장 가까운 곳에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써오던 자의 오랜 관성 같은 것일까. 상상력이 배제된 사실확정의 지점에서 꼭 한 번은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은 현재 대구지방검찰청 서부지청 부부장으로 재직 중인 16년 차 여성 검사 정명원이 쓴 첫 책이다. 

저자는 검사라는 직업이 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차갑고 공격적이고 조직 논리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실상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검사들은 특수부·공안부 검사 들일 뿐이며 이들은 대한민국 전체 검사 중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나머지 90%인 형사부·공판부 소속의, 야근 많고 재판 도중 울기도 하고 민원인과 좌충우돌하기도 하는 ‘비주류’이자 ‘회사원’ 검사들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세상이 지향해야 할 완전무결함이나, 거악 척결 등 거대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늘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검찰청 한 귀퉁이에 기록으로 실려 오는 수많은 인간 군상과, 때론 ‘웃프고’ 때론 애잔하게 저자를 심적으로 괴롭히고 보람을 느끼게 했던 사연들을 이 책에 담았다. 

저자가 직접 만난 사람들에게는 유죄·무죄를 넘어 회색지대가 존재했으며, 공소장에는 다 담지 못하는 이야기가 그득하게 남았다. 재판 도중 사라진 피고인, 상복을 입고 검찰청을 방문한 사기 피해자들, 법정에서 갑자기 자신의 범행을 고백한 증인 등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의 못다 한 이야기가 여러 편의 드라마를 보듯 전개된다. 저자는 정량의 범죄 너머 부정량까지 이 책에 모두 담고자 했다.

-정명원의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에서 

저작권자 © 뉴스앤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