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시인 나태주가 말하는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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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시인 나태주가 말하는 삶의 지혜
  • 안민하 기자
  • 승인 2021.06.30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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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시가 익어가는 마을축제…
시인이 전한 따스한 격려

햇빛이 도로를 달구기 시작하는 30일 오전 찾은 대전 동구 판암동 행복어르신복지관 카페. 로비에 띄엄띄엄 놓인 의자는 일찍부터 온 사람들로 이미 만석이다. 알록달록한 꽃무늬 옷을 입은 할머니,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아기를 안은 부부, 초등학생, 어린이 등 연령대는 다양했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유는 단 하나, 나태주 시인의 특강 때문이었다.

1945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나 시인은 1964년 초등학교 교사가 돼 43년 동안 교직에 머물렀고 1971년 시 '대숲 아래서'로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이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 충남시인협회 회장, 공주문화원 원장을 거쳐 지금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날 특강은 판암사랑하자네트워크, 동구행복한어르신복지관, 생명종합사회복지관이 주관하는 사업 '시가 익어가는 마을축제'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전접수로 현장참여 신청을 받은 특강은 인원에 제한을 둔 대신 유튜브 생중계도 함께 이뤄졌다. 

관객들의 기대가 무르익을 무렵 행사가 시작된다. 특강에 앞서 판암동 시인학교 학생들이 자작시와 시인의 작품을 낭송하는 시간을 가졌고 이어 우리나라 시에 음을 입히는 시노래 전문가수 정진채 씨가 나 시인의 '풀꽃', '멀리서 빈다'에 직접 쓴 음을 녹여냈다. 처음 듣는 곡조였지만 나 시인의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시를 관객들은 곧잘 따라불렀다. 정 씨는 "모르는 노래였을 텐데 이제 아는 노래가 됐을 거라 생각한다"고 분위기를 띄웠다. 

가수 정진채 씨가 '풀꽃'을 열창하고 있다. 정 씨는 시에 직접 작곡한 음을 입혀 노래하는 시노래 가수다. 안민하 기자
가수 정진채 씨가 '풀꽃'을 열창하고 있다. 안민하 기자

드디어 시인이 무대에 올라서자 객석에서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시인이 자신을 소개한 단어는 '무학자 시인'이었다. 시를 따로 공부한 적 없이 홀로 작품활동을 이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객석의 어르신들을 보는 시인의 눈빛은 유독 애틋했다. 그는 "시를 잘 안 배우신 어르신들이 시를 쓰는 게 얼마나 보람차고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저 자신이 그렇다. 지난해부터 시인협회 회장이 됐는데 지금 77세다. 문학공부를 안한 사람도 회장을 하니 글 배우는 분들 계속해서 용기를 잃지 않고 시를 쓰길 바란다"고 응원의 말을 전했다. 

존경하는 시인의 격려에 힘이 났는지 어르신들은 눈시울을 붉히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를 불문한 모두가 그의 말에 흠뻑 빠져 조근조근한 시인의 말이 행사장 끝까지 잘 들렸다.

 

황인호 청장이 나태주 시인의 특강을 경청하고 있다. 안민하 기자
황인호 청장이 나태주 시인의 특강을 경청하고 있다. 안민하 기자

 

가르침에 목마른 이들을 위한 나 시인의 강의는 계속됐다. 그는 "시를 쓸 때 늘어놓듯 쓰면 안 되고 급한 대로 쏟아놔야 한다. 시는 사건을 순서대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대로 급하게 말하는 것"이라며 "앞에 사람이 없어도 이야기하듯 해야 한다. '풀꽃'도 이야기다. '자세히 봐야', '예쁘다'. 이렇게 우리 말은 묻는 말과 답하는 말로 돼 있다”고 설명했다. 

또 "모든 죽어있는 것, 살아있는 것, 동물, 식물, 나, 너를 모두 사람으로 본다 생각하면 시가 쉬워진다"며 "우리 말 자체가 의인법으로 돼 있다. 책상에 무슨 다리가 있나. 의자에도 다리가 있다 하지만 다리가 아니라 막대기다. 그런데 사람으로 비유해서 의자 다리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사물을 의인화해 보는 시각이 시를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창 열정적으로 말을 잇던 그는 문득 한쪽에 서 있던 스태프를 가리키며 "여기 오려고 공주에서 8시 15분 차를 탔는데 9시 몇분 쯤 여기 근무하는 저 친구가 나를 맞이하러 왔다"며 "오늘 아침에 시를 썼다. 저기 있는 저 친구한테 주는 것"이라고 시 하나를 읊었다. 

"처음 만난 처녀 예쁜 손 예쁜 손가락, 둘째 손가락에 은빛 가는 가락지. 왜 그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웠나요. '예뻐 보이라고요'. 그 목소리가 또 은빛이었다."

낭송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우와'하는 감탄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호응에 빙그레 웃은 시인은 "'그 목소리가 또 은빛이었다'는 부분은 내 얘기, 내가 판단한 것"이라며 "금빛은 올드하고 무겁지만 은빛은 가볍고 반짝이고 예쁘고 귀엽고 그렇지 않나. 바로 그래서다"고 해설했다. 여유로우면서도 자만하지 않는 태도에서 일상을 시어로 자아내는 일이 그에게 얼마나 익숙한지 고스란히 보여진다. 

어찌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던지 특강을 듣는 동안 시간을 확인하는 관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특강을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의 눈빛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이들을 달래듯 시인은 자신의 '선물' 낭송과 함께 인사를 남겼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아름 바다를 안은 듯한 기쁨이겠습니다'. 오늘 하루가 저에게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선물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이날 행사는 특히 시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진행자로 참여한 정명숙 씨는 "시인님의 말씀을 듣고 아, 시는 누구나 쓸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조금씩 나를 위해 뭔가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감사한다"며 "너무 감동적이라 무슨 말씀부터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벅찬 심경을 드러냈다.       

배영길 생명종합사회복지관 관장은 "'시를 쓰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마을축제를 준비하던 우리에게 초등학생이 던진 한마디였다"며 "그때는 설명하기 참 힘들었는데 이제는 시를 쓰면 마음이 착해진다고,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이 보인다고, 그렇게 하면 나도 우리 마을도 행복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강의를 마친 나태주 시인이 행사 관계자·참여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민하 기자
강의를 마친 나태주 시인이 행사 관계자·참여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민하 기자

 

안민하 기자 minha961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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