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인 게르드 브란튼베르그는 노르웨이의 소설가이자 ‘여성운동가’다. 그녀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발 벗고 나서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가치관을 글로써 잘 녹여냈다.

이갈리아는 여성 상위 사회로 남성은 맨움으로, 여성은 움으로 불리운다. 맨움은 조신하고 아름답다. 그들은 성기를 감싸는 ‘페호’라는 것을 착용해야 한다. 또 움의 눈에 들기 위해 살을 찌우고, 머리와 수염을 가꾸는 등 늘 외모에 관심을 쏟는다. 움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맨움들은 사회에서 도태되고 늘 놀림을 당하기 일쑤며 반대로 움에게 ‘부성 보호’를 받은 맨움은 하우스바운드로서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한다. 반면에 움은 이갈리아에서 아주 최적의 성이다. 딸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맨움을 휘어잡는다. 그것이 이갈리아가 택한 사회적 성의 모습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그려진 남성의 모습은 여성보다 하등하고 힘이 약하다. 여성은 강인하고 진취적이다. 그럼 책을 벗어나 현실을 생각해보자. “여성은 남성보다 하등 하고 힘이 약하다. 남성은 강인하고 진취적이다.” 아마 대부분 후자에서는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여성이 남성으로, 남성이 여성으로 바뀐 것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문장의 성격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책은 현재 우리 사회가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한 ‘사회적 성의 역할’을 완전히 뒤집어 새로운 시각을 접하게 한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의 현실을 완벽히 ‘미러링’했다. 현실에서 여성들은 이갈리아에서 페호가 부여받는 역할과 동등한 브레지어를 착용하고, 늘 용모에 신경을 쓴다. 과도하게 다이어트를 하여 살을 빼고, 화장하는 데 시간을 쏟아붓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 여성은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고 집에서 설거지하고 남편을 위해 저녁밥을 차리는 모습은 이갈리아의 하우스바운드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필자는 미러링을 통해 남성을 넘어선 여성의 우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러링 된 이갈리아의 사회와 현실로 돌아온 사회의 극명한 차이를 통해 여성이 받는 부당함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인식하자는 것이다.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변화의 첫걸음이지 않을까.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이거 오히려 남자를 차별한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현실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그들을 바라보는 입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현실에선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반면 책에서 제시한 남녀의 역할에 문제를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차별의 핵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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