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첩보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John Le Carre)가 세상을 떠났다. 이 장르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 할지라도,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제목은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근작을 중심으로 떠올려보자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영국의 BBC의 제작 지원으로 연출한 <리틀 드러머 걸> 등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과거에 제작된 작품들도 많고, 아직도 그의 작품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목진태 블루프린트북 대표
목진태 블루프린트북 대표

데뷔작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1961)부터 유작으로 알려진 <스파이의 유산>(2017)까지, 르 카레는 3, 4년을 간격으로 쉼 없이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왔으며, 첩보물이라는 장르를 세상의 독자들에게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이 거장의 가장 위대한 점은 작품이 발표되는 당대의 현실과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끌어들이면서 장르의 미학적 외연을 넓혀갔다는 데 있다. 르 카레의 소설 속 스파이는 이안 플레밍(Ian Fleming)의 ‘제임스 본드’가 펼치는 활극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령 작가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1963)는 냉전의 한 가운데 탄생한 작품이다. 1960년대 분단 체제의 독일, 영국 정보부 요원 리머스는 동족 정보 기관의 실세인 문트와의 첩보 전쟁에서 패배한 뒤 영국으로 돌아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서커스(영국 정보부 MI6의 코드명)의 상부는 리머스에게 동독에 이중간첩으로 거짓 포섭되어 눈엣가시 문트를 제거할 것을 명령한다.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망가진 리머스에게 계획대로 동독 요원이 접근을 해오면서 리머스와 문트의 치열하고도 차가운 두뇌싸움이 펼쳐진다.

르 카레가 그리는 스파이의 세계에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섬세한 간계(奸計)와 반(反)간계가 난무한다. 그들이 누군가를 포섭하기 위해, 그러니까 대상이 끄나풀이 되도록 그들을 옭아매기 위해 막후에서 진행되는 물밑작업들은 굉장히 치밀하다. 정체가 발각되거나 상대가 작전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들은 마치 시계의 부품처럼 차갑고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이 행동들이 어느 부분이 상부의 명령이고 또 어느 부분이 리머스의 의지인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기에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인식할 수 없었던 큰 그림이 있었고, ‘타겟’을 위해 치밀하게 움직였던 것도 기관이 의도한 하나의 소모적인 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절대적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비정한 세상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스파이의 삶은 (독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피곤하고 너절하다. 그리고 첩보 활동을 숨기기 위해 누군가로 위장하서나 연기하면서 살아야하기에 고독한 일이기도 하다. 다른 첩보활극에서 옷빨(?) 좋은 영웅들이 정장을 입고 액션을 펼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르 카레의 소설 속 인물들은 평범하고 늙었고 아저씨스러운 구석이 있다. 다만 현실적인 인물들이 시대의 딜레마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모습은 이 장르의 차가운 정념을 잘 드러낸다. 영화화된 작품에서는 그만큼 위대한 배우들이 이를 표현해낸다. 가령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는 게리 올드만이, <모스트 원티드 맨>에서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무미건조하고 느릿느릿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르 카레의 고독한 남자들을 연기한 바 있다.

완벽한 스파이
완벽한 스파이

 

르 카레의 작품들은 장르적 언어로 세상의 메커니즘을 탐구하기에,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관점을 보여준다. 데탕트로 냉전의 분위기가 누그러진 이후 <리틀 드러머 걸>과 같은 작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모스트 원티드 맨>에서는 9.11 이후의 중동 국가와의 문화적, 외교적 갈등을 담아낸다. 재미있는 점은 시대적 배경이 달라졌음에도 장르의 기본적 언어, 첩보활동이라는 행위의 골격은 꾸준히 유지된다는 점이다. 최근의 작품들에는 철두철미하고 장기적인 ‘포섭’을 중시하는 르 카레의 인물들이 빠른 성과와 단기적 해결을 중시하는 국가와 불화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실 이러한 테마가 작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가 지금까지도 목도하는 이 세상의 모순은 과거와 뿌리 깊게 연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년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가장 최근에 출간된 자전적 소설 <완벽한 스파이> 속 작가의 말에서, 르 카레는 가족을 포함한 모두를 속이고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던 자신의 사기꾼 아버지가 어쩌면 스파이가 아니었을까 항상 생각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작가가 MI6에서 일했던 이력이 있다는 사실보다 흥미로운 동기이다.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뚜렷한 장르 문학이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늘 한 사람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며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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