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은지는 처음으로 잘못하지 않아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에 영향을 받고 책임을 지고 때로는 해결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도.(...) 나무에 매달린 채 햇볕을 받으며 끝까지 익은 귤과, 아직 초록색일 때 가지가 잘려 남은 양분으로 자란 귤. 나는, 그리고 너희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82년생 김지영'으로 차이와 차별의 담론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키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조남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누가 내 얘기를 여기에 쓴 거지?’라고 할 만큼 한 개인에게서 공감의 서사를 예민하게 끌어내는 그가 이번엔 미열과 고열을 오가며 초록의 시간을 지나는 한 알 한 알의 존재에게 시선을 맞춘다. 

숱한 햇볕과 바람을 들이고 맞으며 맛과 향을 채워 나가는 귤 같은 너와 나의 이야기. 사춘기나 과도기로 명명되는 시기를 쉽게 규정하지 않고, “어차피 지나갈 일, 별것 아닌 일, 누구나 겪는 과정으로 폄하하지 않고 그 자체의 무게와 의미로 바라보고 싶어 한” 작가의 다정한 응시가 담겨 있다.

소설은 이 약속을 둘러싼 네 아이들의 속사정을 번갈아 풀어놓는다. 평온하게 흘러가는 타임라인 위에 커서를 대고 잠시 정지된 장면을 들여다보듯, 작가는 인물들의 마음과 주변을 찬찬히 훑는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단짝 친구와 어리둥절하게 끝나 버렸지만 위로받지 못한 소란, 학교의 기대와 모두의 호의를 받고 있지만 외로운 다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수신 불능의 아빠와 무너진 가계로 뻑뻑한 상처를 입는 해인, 이유를 모른 채 친구들의 무리에서 잘려 나간 기억이 있는 은지. 

어긋나는 관계의 화살표 속에서, 미묘해서 오히려 말 못 하는 감정의 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막막함 속에서 지금의 시간을 쌓아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평범한 날 속에 자잘한 생채기가 나면서도 저마다의 악력으로 가지를 쥐고 초록의 시간을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닿아 있다.

학교생활이 힘들어서, 친구 관계가 어려워서, 혹은 내가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답답하고 속상해하는, 그래서 가끔은 엎어져 울기도 하는 작고 여린 아이들의 사유와 감정을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과 “남들도 다 겪는 일이야.” “네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니?”라는 무성의한 말들에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라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토닥여 주고 싶은 마음이 이 소설을 완성시켰다.

-조남주의 '귤의 맛'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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