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위대한 말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추모하며   -목진태 블루프린트북 대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와 책『긴즈버그의 말』  

목진태 블루프린트북 대표
목진태 블루프린트북 대표

지난 9월 18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세상을 떠났다. 이 인물이 여성과 인종, 소수자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만약 누군가 긴즈버그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나는 대신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2018, 이하 <나는 반대한다>)를 추천한다. 영화 속에서 사회문제와 신념을 토대로 고군분투하는 긴즈버그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녀를 조용하게 추모해본다.

영화는 코넬 재학시절부터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많은 판결문과 반대 의견서를 발표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최근까지, 긴즈버그의 행보와 사회상을 되짚는다. 그녀의 발언은 양성평등을 위한 첫 걸음이었고, 70년대 이후에야 고개를 든 여성인권운동에 든든한 날개를 달아주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긴즈버그는 양성평등과 관련된 대법원 제소 6건 중 5건에서 승소했다. 가장 보수적인 조직인 군에서 여성의 근로 조건을 남성의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여성을 배제하는 배심원 구성의 관행을 깨뜨렸다. 양성평등이 법적, 제도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은 세상은 긴즈버그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스베이더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사실 형식적으로 특별한 것이 없는 영화를 다채로운 텍스트로 만드는 요소는 당연 긴즈버그라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다소 보수적인 성향의 대법원에서 판결문과 반대 의견을 휘두르면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진보의 아이콘 긴즈버그. 약자를 위해 늘 급진적인 태도를 취했을 것 같았던 사람이지만, 대법관 재임 초중반기에 그녀는 연방대법원에서 진보인사 가운데 가장 중도 성향이 강한 인사로 구분되었다. 성향이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지 않는 특유의 스타일로 인해 지독한 보수주의 대법관 스캘리아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긴즈버그에 대해 과묵하고 소심하다는 평가도 지배적이다. 물론 산전수전을 다 겪은 최근의 긴즈버그는 각종 컨퍼런스와 세미나에서 대중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유머러스한 연사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영화는 긴즈버그가 헬스 트레이너와 함께 열심히 운동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투사적 이미지(Notorious RBG)와 공명하며 또다른 싸움을 위해 체력을 단련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미 몇 차례 암투병을 했던 연로한 대법관이 트럼프 재임기간 중 언제 별세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씻기 힘들게 하기도 한다. (연방대법관은 종신제이고,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에 어떤 정권에서 교체가 이루어지는 지가 항상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강인하고 단호하며 근엄한 대법관의 모습은 영화에서 실제적인 이미지로 등장하지 않는다. 긴즈버그가 양성평등과 여성의 임신 중절권을 굳은 표정으로 주장하는 장면은 대법관 인준 청문회 장면이 거의 유일하다. 대신, 모두가 열광하는 긴즈버그의 대법원 판결문과 소수의견(나는 반대한다)은 법정 이미지에 자막과 나래이션으로 덧입혀진다. 이는 대법원 판결 장면을 촬영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조건 때문이겠지만, 역설적으로 긴즈버그가 가졌던 최강의 무기, 말과 언어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 볼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긴즈버그의 말

다행이라고 말하긴 싫지만, 아무튼 국내에도 긴즈버그의 발언을 정리한 <긴즈버그의 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을 차근차근 들여보다 보면, 긴즈버그라는 한 인물의 인생과 사유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다. 책에서 긴즈버그는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32쪽)라고 말했는데, 헌법을 시대정신과 사회적 흐름에 맞게 해석하며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우리 대부분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 그러나 ... 편향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 나는 세뇌하려고 애쓰지 않지만, 나 자신을 중립적인 사람으로 제시하지도 않는다.”(148쪽)라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이 어딘가 치우친 생각일 수 있기에 올바른 것인지 매번 가다듬고 점검해야하며, 항상 옳다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긴즈버그는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리고 반대 의견과 함께 조율하고 배우고 때로는 날을 벼르는 과정을 통해야만 가치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긴즈버그는 시대가 요청할 때 가장 강력한 칼날을 약자의 손에 쥐어주었던 사람이었다. 법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여성 인권을 세우려는 사회적 흐름에 물고를 틔어준 것이라면, 긴즈버그가 소수의견을 거침없이 냈던 최근의 미국 사회는 반대로 예전에 세워놓았던 가치들이 퇴보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부터의 발언을 모아놓은 <긴즈버그의 말>을 지금 읽어도 조목조목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그녀가 바로잡고자 했던 시대에 온전히 다가서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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