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제1요인은, 일본의 주요 전기산업이 TV시대의 종언과 모바일형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점이다. (중략) 다른 하나는 1990년대부터 글로벌한 규모로 전개된 수평 분업구조에 일본기업이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체제는 ‘계열’ ‘하청’이라는 종래의 일본적 발상을 무의미하게 했다. 즉 일본 기업들은 오랜 기간 익숙해진 조직원리의 근본적인 변경을 요구받게 됐다. 이것이 전통적인 일본 대기업에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일본의 헤이세이(1989~2019) 시대는 두 차례의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대참사 외에도 정치개혁 실험이 좌절하고 샤프, 도시바 등 기업들도 글로벌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속속 무너지던 ‘잃어버린 30년’이었다. 1989년 세계 시가총액 상위 50개사 중 32개사를 차지했던 일본 기업은 2018년에는 도요타(35위) 외엔 전멸했다. 사회적으로도 비정규직 증가, 인구감소, 지방 소멸위기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고,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같은 엽기적인 사건들도 충격을 가했다. 동일본대지진과 원전사고는 전후(戰後)에 구축돼 쇼와 시대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작동되던 일본형 시스템의 한계를 총체적으로 드러냈다. 연약한 지반이 수분을 머금어 액체 같은 상태로 변하는 ‘액상화’가 일본 사회의 각 분야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이 헤이세이 말기다.

저자는 헤이세이의 액상화는 갑자기 벌어진 것이 아니라 쇼와 시대에 진행된 지반약화의 결과라고 진단한다. 1970년대 말부터 세계사적 대전환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지만, 일본은 오일쇼크를 무난히 극복한 데 따른 안도감에 사로잡혀 변화를 직시하지 못했다고 본다. 이런 안도감이 1980년대 경제 버블의 형성과 붕괴를 가져왔고, 1990년대 이후 전개된 글로벌화의 다양한 위험과 도전에 대한 응전에서 실패를 초래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그 결과 헤이세이 일본에서 발생한 여러가지 쇼크(버블경제의 붕괴, 한신·아와지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2001년 미국 동시다발테러와 이후 국제정세의 불안정화,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와 동시병행적으로 전개된 글로벌화와 넷사회화, 저출산고령화 등 충격 속에서 일본은 좌절해갔고, 이를 타개하려는 시도들이 실패했다. 쇼와의 빛나는 성공신화가 헤이세이 일본의 태세전환을 어렵게 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한때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일본 전기·전자산업의 어이없는 몰락은 그 단적인 예다.

이 책은 아사하라 쇼코 옴진리교 교주, 카를로스 곤 닛산 전 회장, 대중가수인 미소라 히바리, 고무로 데쓰야, 아무로 나미에, 우타다 히카루,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 안노 히데아키, 오토모 가쓰히로 등 각 방면의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이들이 헤이세이 일본을 어떻게 직조해 나갔는지를 보여준다. 일본의 서브컬처에서 자주 등장하는 ‘종말’ 서사가 헤이세이 시대와 어떻게 조응했는지도 흥미를 더해준다.

-요시미 슌야의 '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서

저작권자 © 뉴스앤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