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의 수요일' 을 읽고 

신현종 조선일보기자
신현종 조선일보기자

"나는 그때 아직 열두 살이었습니다. 뭐가 뭔지 전혀 몰랐습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웠는데 그는 나를 바닥에 눕혀 짓누른 채 칼로 내몸에 상처를 냈습니다. 나는 피를 흘렸는데 그는 바지를 벗어 버리고 나를 강간했습니다. 내가 피를 흘리며 우는데도 그는 나를 강간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네무라'라는 군인이 들어왔는데, 가네무라는 나에게 조선 여자라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내 옷을 벗겨 알몸을 만든 후 그 남자도 칼로 내 몸, 특히 가슴 부근에 상처를 냈습니다. 내 몸을 보면 온 몸이 상처 투성이 입니다."

열두 살때부터 '위안부'가 되었던 북한 김영숙 할머니의 증언이다. 열두 살은 여자에게 꽃답다는 표현이 무색할정도로 어린나이다. 그렇게 이 땅의 많은 처녀들이 꽃처럼 아름다운 나이에 일본군의 성적 노예가 되어 자신의 젊음을 짓밟히거나 혹은 마감했다.

'25년간의 수요일'은 수요집회가 열렸던 지난 25년간의 수요일에 대한 이야기다.

수요집회는 일본군 위안부 조직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그 부당함을 규탄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집회다. 정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다.

일본군 '위안부'는 1932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동원한 성노예를 말한다.

'위안부'를 표기한 여러 글들을 자세히 보면 단어에 작은 따옴표가 있다. 그것은 위안부라는 명칭이 글자 그대로 일본군들에게 위안을 주는 집단이 아닌, 단지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라 명명되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문 공식표기는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일본군 성노예")다.

일본 군인들이 강제적으로 혹은 취업 사기로 많은 젊은 여성들을 데려가 '위안부'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점령지에서의 군 강간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점령지마다 약탈, 강간, 방화, 포로 참살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강간은 점령지에서의 반일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었기에, 점령지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선 군인들의 강간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당시 일본 점령지에서 일어난 약탈, 강간 행위에 대해 현지인들은 일제히 궐기하여 죽음으로 보복하는 등 그 반향이 거셌기에 일본 지휘부는 '위안부' 라는 군 성노예 집단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위안부' 설립의 또다른 목적은 군인들의 성병 예방에 있었다. 점령지 중 중국 성매매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성병에 걸려 있었기에 시설을 이용한 군인들의 성병 감염이 심각했다. 이는 또 다른 군인들의 전염으로 이어졌고 성병에 걸린 군인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병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군은 어느 정도 성병이 관리되는 성행위 시스템이 절실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전장의 일본 군인들의 성적 욕구 해소를 위한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그들은 그 종사자들을 '위안부'라 불렀다.

그런데 문제는 '위안부'라 불리었던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의가 아닌 공권력에 의한 강제나 사기에 의해 그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데 있다. 더 아픈 사실은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여성들이 돈을 벌기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실상 식민지의 토지와 생산 시설을 장악한 일본인들은 처녀는 물론 힘없는 여자아이까지 무자비하게 전쟁에 동원했다. 증언에 의하면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납치하거나 유학등을 미끼로 '위안부'를 모집하기도 했지만, 일본군 차원의 '징집​'의 형태로도 소녀들을 데려갔다. 군은 이렇게 모은 어린 소녀들을 전쟁터로 이동시켜 성노예로 만드는 모든 것에 관여했다. '위안소'는 군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녀들은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대로 끌려 다니며 상상하기도 힘든 성노예로서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위안부'의 하루는 실로 처참했다. 생리 중에도 어김없이 많은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으며,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폭행 당하는 와중에도 끝없는 멸시와 구타를 받았다. 나이가 어려 질 입구가 성숙하지 못한 소녀는 칼로 질 입구를 찢어 삽입을 원활하게 했고, 반항하는 소녀는 칼로 몸을 베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씻지도 못하고 많은 날은 40명에 가까운 군인을 상대하다보니 소녀들은 말라리아와 결핵, 성병에도 쉽게 노출되었다. 성관계 도중 임신한 소녀들은 강제로 낙태를 시킨 뒤 도로 위안소로 돌려보내 '위안부' 생활을 이어가게 하거나 아니면 총살됐다.

처참한 대우를 받으며 성노예 생활을 이어가던 소녀들에게 어느 날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1945년 8월 15일 그녀들을 학대하던 군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물론 모든 소녀들이 이 해방의 기쁨을 누린 것은 아니다. 퇴각하는 일본의 군인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만행을 감추려 많은 '위안부'를 참살했다. 어렵게 살아남은 소녀들에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막상 고향으로 돌아온 '위안부' 소녀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의 위안부였다는 이유로 해방 초기에는 식민지 사람들의 살해 협박에 시달리기도 하고, 많은 돈을 지급했다는 일본의 주장과는 달리 수중에 돈이 없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점령지에서 남은 삶을 이어가기도 했다. '위안부' 중 최갑순 할머니는 만주에서 고향까지 4년을 걸어왔다고 했다. 맨발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 4년은 '위안부' 생활과 다름없는 고통의 길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배고픔과 성폭행도 이어졌다. 이렇게 대다수의 소녀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머나먼 타국에서 서러운 생을 마감했다.

25년간의 수요일 -윤미향 저-
25년간의 수요일 -윤미향 저-

 

한 조사에 의하면 어렵게 고국에 살아 돌아 온 '위안부' 피해자 여섯 명 중 네 명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였다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고향을 찾지 못한 것이다. 힘들게 고향에 돌아 온 나머지 두 명도 주위의 편견에 삶이 고단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끌려가 성노예로 하루하루를 버티다 해방을 맞고 죽음의 고비를 넘어 고향을 찾은 이들에게조차 '위안부'였던 고통의 낙인은 쉬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위안부'는 일본군들의 점령지였던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그리고 일본인 자국민까지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있지만, 완전 식민지였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많이 동원됐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피해국들은 지금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과 사과, 배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위안소'의 운영은 일부 민간업자들이 주도한 행위일 뿐, 정부나 군대차원의 개입은 없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이에 우리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수요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 후 일본은 '위안부'의 국제적 관심이 커지자 무라야마 총리시절 민간단체 주도의 '국민기금'을 설립, 모금액을 통한 '위안부'피해자 합의를 진행하려 했다. 피해자들의 요구는 무시한채로 모금활동을 진행한 후, 자국민에게는 도의적인 책임에서 지급하는 위로금이라 홍보하고 국제사회에는 이것을 보상금이라 설명했다. '위안부'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 주체가 일본 정부가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민간단체의 일로 치부해 버림으로써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것이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도 '위안부' 문제해결을 더디게 하는 요인이다. '한일협정'으로 일본은 3억 달러를 우리나라에 무상으로 지급하고 2억달 러를 10년에 걸쳐 빌려주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식민지 범죄에 대한 배상이 아닌 독립축하금 및 경제협력금이라 국내에 홍보했다. 그리고 국제사회에는 전쟁에대한 보상금이라 말했다. 이 협정으로 받은 돈은 대부분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쓰이고 실제 일제로부터 피해를 받은 국민들에게는 극히 일부의 금액만이 쓰였다. 일본 정부는 이 협정에 의해 일제 과거사 피해자들이 가진 권리가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1965년 한일 협정의 모든 문서를 공개하고 일본 정부에게 법적 책임이 남아 있으니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우리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해방 70주년이었던 2015년 아베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타결 짓는다는 갑작스러운 발표를 한다. 애매모호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재단에 일본 정부가 10억엔을 낸다는 게 그 합의의 골자였다. 여기에 한국 정부는 앞으로 국제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 대사관 앞에 세운 평화비를 철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우리 정부의 노력을 기대해 온 '위안부' 할머니들에겐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과였다. 89세의 김복동 할머니는 그동안 이토록 끈질기게 노력해 온 것은 돈이 아니었음을,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위안부' 할머니들은 또 26년간의 수요일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1945년 패전한 일본에는 많은 미국인 주둔군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는 이 미국인들을 위한 위안소가 별도로 설립되었다. '특수위안시설협회(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약칭 'RAA'였다.

속칭 진주군을 위한 위안부들의 성명서에는 "수천의 제물이 되어 광란을 막을 방파제를 쌓아 순혈(純血)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미군을 대상으로 성상대를 자신들로 제한함으로서 민족의 깨끗한 피를 보존하는 제물이 되겠다는 의미다. 자신들 민족의 피가 깨끗하다는 것은 순혈주의로 '자민족 우월주의'의 사상이다.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논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그 대의를 위해 여성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는 일본인의 편협한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본은 패전의 와중에서 조차 침략국으로서의 책임 의식이나 반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꽃으로도 때리기 싫은 소녀의 삶을 망가트리고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보며, 새삼 그릇된 가치의 단단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할머니들은 끊임없이 일본에게 말한다.

우리의 젊음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었기에 지난 일에 대해 사과 받을 자격 또한 충분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정의기억연대 대표였던 윤미향 저자는 책 말미에 말한다. 28년 동안 일본 정부를 향해 외쳤던 과거사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과 책임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지난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국이였던 한국군들도 베트남 국민들에게 일본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잘못을 저질렀다. 우리는 베트남 전에서 많은 죄 없는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성폭행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한국군 2세들도 태어났다.

일본은 3번에 걸친 배상으로 늘 협의의 완결 여부에 대해 이견이 있지만, 우리는 베트남 국민들에게 그 어떤 작은 사과도 건넨 이력이 없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대해 일본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만큼, 우리 또한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에게 저지른 만행을 돌아보고 배상해야 한다.

진정성 있는 사과에는 지난 과오에 대한 참회가 필요하다. 늘 남에게 요구했던 강도 높은 반성이 막상 우리 일이 되고 나니 움찔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자신의 과오도 인정할 줄 알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외쳤던 시간을 이제는 우리에게 돌려야 한다.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보다 알면서 행하는 죄는 분명 그 무게의 경중이 다를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28년 간의 수요일을 책임지고 있는 정의연 전 대표의 말 또한 온전히 믿고 싶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달려 온 그들의 따뜻한 시간을 마음을 다해 존중하고 싶다. 어린 소녀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다하고 가는 발걸음까지 진정어린 사과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그들을 대신해 오랜 세월 그들과 함께 한 정대협과 정의연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그들의 삶에 큰 위로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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