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이세정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엄마와 나는 단 둘이서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이다. 핫 핑크색 레깅스를 입은 괴상한 가이드와 함께 한 첫 번째 대만 여행부터 이번 제주도 여행까지. 돌이켜보면 우리 ‘둘’ 만이 보낸 시간은 꽤 길다고 할 수 있겠다.

이세정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가족과 친구 각각의 허용범위가 있다면 엄마는 두 영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존재다. 터무니없는 일로 아웅다웅 하기도 하지만 함께 하는 시간 대부분은 편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나보다 15cm 이상 작은데도 말이다.

첫 번째 제주도 여행은 고3 마지막 겨울. 정시에서 마지막 남은 대학마저 떨어지고 어쩔 수 없이 재수를 택해야 했던 그야말로 내 인생의 암흑기를 맞이한 때이다. 재수기숙학원에 입소하기 딱 한 달 전, 눈물자국으로 뒤엉킨 내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엄마는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 2 장을 끊었다. 그렇게 여행은 즐거움과 좌절의 감정 혼돈으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래서 당시 여행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지 않아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가 다르다. 원하는 대학의 진학 이후 만족스러운 학점에 즐거운 방학까지. 과제는 없고 이젠 놀 일만 남았다! 우리는 제주도를 재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우릴 맞이한 건 바로 엄청난 강풍. 정신 놓고 있으면 몸이 날아 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강도의 바람이다. 옷깃과 머리카락이 사방팔방으로 날려 당장 눈 앞의 시야를 차단한다. 머리카락에 의해 가려진 시선 틈으로 햇빛에 반사된 에메랄드빛 파도가 반짝 거린다. 이제야 제주도에 왔음을 실감한다.

제주도에 오면 꼭 먹어줘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전복이다. 첫 번째 제주도 여행 때 방문 한 적 있는 전복요리 전문 식당으로, 오픈시간보다 5분이라도 늦으면 장장 30분을 기다려야 하는 소문난 맛집이다. 우린 자리에 앉자마자 버터전복구이와 전복 돌솥밥을 재빠르게 주문한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식탁 위로 수십 가지의 반찬들이 차려진다. 전복이 어찌나 큰지 내 주먹만 하다. 비싸서 자주 못 먹는 전복을 이렇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니. 솔직히 전복 맛은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하지만 바다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경치 값이 공짜니 명소임은 틀림없다.

엄마와 나는 음식에 대한 공통된 철학이 있다. 먹는 데 돈 쓰는 걸 아깝게 생각 말고 입과 위장을 행복하게 해주자는 주의이다. 또한 그 지역만의 고유한 재료와 손맛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편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 다 먹고 나머지 하나가 남았을 때 서로의 그릇에 앞 다투어 옮겨주는 마음은 자연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물질적인 기념품 그 이상으로 소중하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 우리는 용눈이 오름으로 향한다.

제주도는 지리적 특성상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길다. 차 안에서 스마트폰만 본다면 정말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간이 되겠지만 창 밖에 보이는 이색적인 광경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현무암으로 쌓은 돌담길, 드넓게 펼쳐진 귤 농장은 내 시야를 지루할 틈 없이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용눈이 오름은 용이 누워 있는 모양이라고도 하고 산 한가운데가 크게 패어 있는 것이 용이 누웠던 자리 같다고도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눈이 오름의 첫 인상은 미역된장국이었다. 넓게 펼쳐진 갈색 빛의 들판에 초록 풀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는 그 조화가 꼭 된장국에 빠진 실없는 미역 같다. 산의 밑자락에서 올려다 본 용눈이 오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 걷다보면 곧 판단미스임을 깨닫는다. 가는 길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등산로는 한겨울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게 한다. 그렇게 허우적대며 정상에 도착.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제주도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바다와 성산일출봉, 드넓게 펼쳐진 대지에 압도되어 순간 멍해진다. 머릿속은 온통 푸름과 붉은 색상의 향연으로 가득 찬다. 인공의 힘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자연의 곡선을 보면 영감이 마구 떠오른다. 사실 날씨가 좋진 않다. 금방이라도 비를 퍼 부울 것 같은 먹구름이 하늘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이 덕분에 강렬한 태양빛이 차단되어 풍경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아 숨을 헉헉 거리면서도 우리는 즉흥적으로 다음 목적지를 검색한다. 여기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빛의 벙크로 발걸음을 옮긴다.

관객과 작품의 소통을 위해 몰입형 미디어아트라는 색다른 전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를 둘러싼 수십 대의 프로젝터와 웅장한 음악이 내가 서 있는 곳을 곧 작품 속 공간으로 끌어들여 엄청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시즌마다 다양한 아티스트의 작품이 있지만 우리가 본 건 빈센트 반고흐와 고갱의 작품이다. 내 키 두 배를 훌쩍 뛰어넘을 높이에 그보다 더 넓은 폭의 공간. 이 공간은 모두 프로젝터에 의해 비춰진 작품으로 도배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벽에 걸린 부동의 작품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맛 볼 수 있다. 작품의 요소 하나하나가 나풀거리기도 하고 쌩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벽에 가까이 가면 내 몸에 작품이 비치게 되는데 이는 곧 작품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작품 속에 내가 들어간 건지 작품이 나한테 들어온 건지 착각이 들 정도로.

 

둘째 날은 드라이브로 시작해서 드라이브로 끝나버린 날.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은 시간이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사려니 숲길을 가기 위해 우리는 한라산으로 가는 국도로 향한다.

사실 엄마는 운전을 전문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운전 솜씨가 만만치 않다. 물론 베스트 드라이버라는 뜻은 아니다. 같이 여행하면서 십년감수 하는 것이 일상이라 차에서 편히 잠들 수 없다. 뒤에 차가 너무 바짝 붙지는 않는지, 빨간불인데도 엑셀을 밟는 건 아닌지 옆에서 철저하게 감시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고 싶은 편이다. 이 날은 눈발도 소소하게 휘날려 더욱 더 눈에 불을 켜고 엄마를 감시해야한다.

한라산행 국도로 가는 길 주변 곳곳에 노점상이 있다. 음식 철학이 남다른 우리는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한 곳에 노점상 3개가 똑같은 형태에 똑같은 메뉴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그 중 한 곳이 눈에 띈다. 중년의 부부가 우리를 간절하게 쳐다보며 자기네 가게로 오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멋쩍어하며 그 쪽으로 향한다. 그제야 부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손님은 우리 둘 뿐. 여러 대화가 오고 간다. 몇 살인지, 엄마가 아니라 언니인줄 알았다는 등.. 고향얘기가 나왔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대구 출신, 심지어 옆 동네 주민이었기 때문이다. 제주도 한복판에서 고향이 같은 사람을 만나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새삼 세상이 좁다는 걸 여기서 또 한 번 느낀다. 주문한 천혜향 생과일 주스는 그냥 마트에서 파는 오렌지 주스의 맛과 별 다를 건 없었지만 타지에서 고향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의의를 두기로 한다.

엄마의 서툰 운전솜씨로 천신만고 끝에 사려니 숲길에 무사히 도착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려니 숲길 ‘주차장’에 도착했을 뿐. 우린 사려니 숲길 입구에 발조차 들이지 못한다. 사려니 숲길 전용 주차장에서 사려니 숲길까지 걸어서 자그마치 왕복 2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용눈이 오름도 겨우겨우 등반한 저질체력인 우리에게 왕복 2시간은 사치다. 100미터도 채 걷지 않고 우린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이럴 땐 또 죽이 척척 맞는다.

역시 우린 먹는 게 최고다. 사려니 숲길에 가지도 못한 주제에, 그래도 열심히 걸었으니 스스로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며 횟집을 가기로 한다. 인스타 감성보다는 맛과 질이 우선인 우리는 제주도 주민의 추천으로 골목 구석에 자리 잡은 어머니 횟집으로 향한다. 정말 식당 이름이 어머니 횟집이다.

손님은 우리 둘 뿐. 가게 문을 열자 누워서 뉴스를 시청하고 있던 아저씨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다. 이 가게 사장님인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부엌으로 향한다. 그리고 우린 여태껏 먹어보지 못한 벵어돔이라는 회를 주문한다. 회도 회지만 곁들여 나온 전복과 소라회, 갓김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상추에 회 두 점과 전복회, 쌈장과 갓김치까지 곁들이면 완벽하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우린 엄지를 날린다. 역시 인적이 드문 골목의 오래된 작은 식당이 곧 맛집이라는 건 불변의 법칙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너무 좋은 경험만 해서 돌아가기 몹시 아쉬운 마지막 날이다.

여행 시작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더니 둘째 날엔 눈이, 마지막 날엔 기어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용머리 해안은 궂은 날씨 때문에 배를 탈 수 조차 없다. 그렇게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우리의 드라이브가 또 시작된다.

다행히 애월 한담 해안산책로에 도착할 땐 비가 차츰 멈춘다. 3년 전 왔던 곳이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날씨가 좋진 않았다. 강풍으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려 사진 한 장 건지기 힘들었다. 그래도 그때 보단 상황이 나쁘지 않다. 날씨도 마음도. 비록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꿀꿀한 날씨지만 머리카락이 통제불능인 정도는 아니다. 이때다 싶어 우리는 사진을 마구 찍기 시작한다. 요상한 동작을 하고 있는 돌하르방을 따라 찍기도 하고 갯바위 위에 서서 대(大)자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포즈를 취함에도 남의 시선 따위는 두렵지 않다. 앞으로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인데 뭐.

3일 동안의 여행은 굉장히 짧았지만 거기서 경험한 다양한 감각들과 여운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사실 이번 여행 또한 서로에게 서운한 점들이 있었을 것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서로 다른 이들이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여행 직후의 기억과 두 달이 지난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느낌이 또 다르다. 전에는 스쳐갔던 기억이 시간이 흘러 갑자기 떠오른다면 그렇게 추억은 더 높이 그리고 더 깊이 쌓이는 것이다. 벌써 엄마와의 여행에 대한 추억은 상당히 두터워져있다. 그리고 더 단단하게 만들어 가고 싶다.

저작권자 © 뉴스앤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