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마트 모델은 ‘월마트 민주주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우리 시대의 전 사회적 국면을 휩쓸고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의 대형 유통업체들도 기본적으론 월마트 모델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이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갈등을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영세 자영업자들의 생존권 문제 때문이었다. 이젠 대형마트마저 온라인 쇼핑과 모바일 쇼핑의 공세로 생존이 위협받고 있기는 하지만, 소비자들은 아직까지는 대체적으로 대형마트의 편이다. 그래서 딜레마다. 현 방식의 소비자 지상주의가 과연 궁극적으로 소비자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인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지 등 앞으로 답해야 할 질문이 많다."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쇼핑 행위가 정치적 행동주의의 유력한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즉, 유권자가 투표하듯 소비자가 시장에서 특정한 목적을 갖고 구매력으로 투표한다고 보는 것인데, 시장을 정치적 표현의 장(場)으로 간주해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대신 기업에 투표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된 가운데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투표가 요식행위일 뿐 선거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냉소로 무장하고 있다. 오히려 일상적 삶에서는 유권자가 아닌 소비자로서 그 힘이 더 크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살아간다. 
소셜미디어 혁명과 참여의 문제는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소셜미디어가 여론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셜미디어의 속성과 부합되는 ‘따로 그러나 같이’라는 슬로건이야말로 ‘쇼핑’과 ‘투표’를 화해시키는 길이 아닐까? ‘정치 정상화’의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발전을 위해선 넘어야 할 큰 벽이 있다. 그건 바로 “소비자는 왕이다”는 근거 없는 미신이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라 봉이다”는 반론도 있지만, 소비자를 정말 왕으로 대접하는 기업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 의문이 강하게 들긴 하지만, 중요한 건 널리 외쳐지는 이 미신적 슬로건이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사람들이 약자를 대상으로 ‘갑질’을 하는 심리적 근거로 활용되어왔다는 점이다.

일부 기업들은 이 미신을 노동자와 하청업체들에 온갖 횡포, 아니 사실상의 착취를 일삼는 ‘면죄부’로 활용해왔다. ‘소비자=왕 모델’은 ‘갑질 모델’이자 ‘착취 모델’이다. 소비자에겐 권리만 있는 게 아니라 의무도 있다는 의식이 널리 확산될 때에 비로소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소비자는 왕이다”는 근거 없는 미신에서 벗어나 시민 소비자로서 권리와 책임에 투철해야만 ‘갑질’과 ‘착취’를 없앨 수 있다.

이 책은 그 어떤 문제와 한계에도 한국에서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문제의식이 낳은 산물이다. 많은 지식인이 ‘시민의 소비자화’를 개탄하지만, 일부일망정 명분을 내세운 시민이 명분을 내세우지 않는 소비자보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다분히 허구적인 ‘시민 우위론’을 내세운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오히려 많은 진보주의자가 ‘시민’을 앞세워 진보 행세를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철저히 ‘소비자’ 그것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윤리적인 소비자‘로 살고 있는 이중성과 위선을 깨는 풍토를 조성하는 게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강선영 기자 ksy@newsnbook.com

-강준만 '쇼핑을 투표보다 중요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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