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의 특장은 도망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타고나게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게 내 경우에 도주 능력인 거지. 참 잘 도망치는 사람인 거야. 상황이 너무 나빠지기 전에, 다치기 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도망치는 사람."

 

 

 

'옥상에서 만나요'는 창비장편소설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가 정세랑의 첫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 '옥상에서 만나요'는 직장에서 부조리한 노동과 성희롱에 시달리며 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나’가 회사 언니들의 주술비급서를 물려받고서 마침내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 표면에는 주술비급서가 있지만 ‘나’를 버티게 한 힘은 사실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던 사람들,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않게 막아준 언니들인 셈이다. 해서 ‘나’는 “내 후임으로 왔다는 너”를 염려하며 ‘너’가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발견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남긴 자리에 앉은 누군가에 대한 염려는 그 마음만으로 단단한 연대의 힘을 만들어낸다.

같은 드레스로 연결된 44명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 '웨딩드레스 44'는 한벌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결혼한 혹은 결혼할 여성들의 이야기를 44개의 짧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담아냈다. 낭만적 신화가 아닌 제도로서의 결혼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작품에는 다양한 여성 서사가 등장하는데, 특히 이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입은 여성이 고등학생들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할 때쯤에는, 혹은 하지 않을 때쯤에는 과연 어떤 풍경이 그려질 것인가. 정세랑은 이처럼 다양한 여성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이러한 동시대성을 정세랑만큼 독특한 감수성으로 보여주는 작가는 단연코 없을 것이다.

이혼한 뒤 집 안의 물건을 모두 처분하는 ‘이혼 세일’을 열게 된 ‘이재’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혼 세일'에는 “40대가…… 50대가 보이질 않아. 선배들 다 어디로 사라졌지?” 물으며 여성으로서 느끼는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 기분 속에서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보는 목소리도 있다.

'효진'의 주인공 효진은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쳐온 인물이다. 효도 효, 다할 진이라는 이름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아버지로부터, 가난해서 자기를 떠났다고 생각하는 열등감 가득한 전 애인으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예고된 불행에 맞서는 인물이 아니라 도망치라고 말할 뿐인 효진의 목소리는 지금-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상한 용기를 불어넣는다.

한편 곶감을 먹으면 죽는다는 뱀파이어가 되고 만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77 사이즈', ‘은열’이라는 여성 인물을 상상하여 전근대 한일관계사 속에 놓아둔 '알다시피, 은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나라가 화살편지로 인해 오해를 쌓아가는 '이마와 모래'는 작가가 얼마나 다양한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강선영 기자 ksy@newsnbook.com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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